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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어가 들려주는 무한 이야기>> 안수진 지음. 자음과 모음.
3년의 세월을 허비하며 직선과 평면 위의 점의 개수가 같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친구 데데킨트에게 칸토어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편지는 “나는 보았지만 믿지 않는다”라고 맺는다.
직선이 1미터라면 평면은 1미터 길이의 직선 4개가 모여야 평면이 된다. 직선은 길이만 있지만, 평면은 넓이가 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평면은 직선에서 보다 점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넓어 훨씬 많은 점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직선과 평면 위의 점의 개수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보고서도 스스로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무한 집합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하는 듯하다. 유한집합, 즉 개수가 정해진 집합에서는 당연히 점의 개수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A집합이 원소가 10개이고, B집합이 원소가 20개라면 당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직선과 평면 위의 점의 개수가 같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선 위의 점과 평면 위의 점을 일대일 대응을 하면 같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직선은 1차원이고 평면은 2차원이다. 직선의 길이가 1이면 직선은 0에서 1에 있고,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이 있다. 정사각형의 모든 점은 (x,y) 좌표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정사각형 위에 있는 한 점의 x좌표에서 한 숫자를, y좌표에서 다른 숫자를 번갈아가며 선택하여 소수 부분을 나타낸 점은 [0, 1] 위에 있다고 한다. 정사각형에서 한 쌍의 수로 주어진 점들은 각각 선분 위에 있는 한 점과 대응시킬 수 있다고 한다. 고로 점의 개수는 같다. 정사각형에는 공간이 있기에 점을 좌표로 표시할 수 있는 반면, 공간이 없는 직선에서는 하나의 수로만 표시가 가능하다. 그의 방법은 좌표 위 점(0.a1a2a3---,0.b1b2b3---)을 직선 위에서는 0.a1b1a2b2a3b3----로 나타낼 수 있고 대응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좌표 (0.1,0.5) 점은 직선에서 0.15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하면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한 혹은 연속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수학에서는 직선, 평면, 입체는 다른 차원이고 다르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차원에 속하는 집합들끼리 대등하다는 결론이 나온 셈이라고 한다. 이 발견으로 칸토어는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였고, 기존 수학자들로부터도 계속적인 공격을 당하였다고 한다. 생애는 평탄치 않았다고 한다. 칸토어의 묘비에는 “수학의 본질은 그것이 갖는 자유로움에 있다”는 그가 언급한 말이 쓰여 있다고 한다. 이런 식의 칸토어의 무한(무한 집합)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현대 수학 혹은 집합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수학에서 ‘무한’을 처음 쓴 사람이 칸토어는 아니지만, 집합론을 통해 무한을 보여준 수학자가 칸토어가 아니었을까? 증명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아니면 개념을 만들었다고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수학만이 아니라 기하학이나 종교, 철학 등에서도 무한은 두루 사용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도 하고, 종교에서는 무한 대신 영원이라고도 하는 것도 같다. 무한한 잠재력에서의 무한은 무엇이고, 종교나 철학에서 주장하는 무한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흔히 우주는 무한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주가 무한한지 유한한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단지 ‘유한’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지, 아니면 끝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한’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었기에 그럴까? ‘무한’을 어떻게 증명한다는 말인가? 글자 그대로 ‘무한’인데, 어쩌면 칸토어가 ‘무한’을 집합론으로 증명한 것일까? “겨자씨 하나에 온 우주가 있다”, 혹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혹은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다”라고 한다면 일반 상식으로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나름대로 근거가 잇겠지만, 칸토어식으로 일대일 대응을 무한하게 할 수 있기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겨자씨 안에 원자나 점은 우주에 있는 원자나 점에 무한대로 일대일 대응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다. 혹은 한 사람이 세계라는 주장에도 대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수학책을 읽다보면 ‘왜’라는 질문도 하게 되지만, ‘그게 뭔데’ 같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누가 ‘무한’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무한은 종교나 철학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싶다. 피타고라스 같은 수학자가 세계를 모두 수로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수를 ‘신’처럼 숭배했다고도 했다는데 수긍이 갈만하다. ‘무한’도 수로 나타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이나 ‘우정’이나 ‘운명’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는 그럴 필요도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사랑’이 사람마다 다른 문법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면, ‘사랑’을 신뢰할 수 있을까? 사랑은, 요즘 들어 그 공리가 의심받지만, 결혼으로 증명된다고 제도화 되었다. 하지만 수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가. 하여튼 주장만 있고 증명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하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이 무한은 여러 방면으로 뻗어가는 모양이다. 알프레 제로(수의 무한)+1=알프레 제로(수의 무한). 알프레 제로를 부정확하지만 무한이라 단순화 시켜보자. 그럼 무한에 1을 더해도 무한. 무한*2=무한. 등도 증명된다고 한다. 유한집합에서는 원소의 개수를 위수라 하고 무한집합에서는 기수(농도)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연수와 유리수는 기수가 같다. 직선과 선분이 대등하고, 무리수와 실수는 연속체다. 직선과 평면의 기수도 같고, 부분집합이니. 멱집합이나, 진부분집합이니 하는 숱한 집합론이 파생하고, 극한과 수렴도 패러독스도 뒤를 따른다고 한다. 칸토어의 무한은 엄청난 생식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연수가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한 수학자가 있다고 한다. 그는 자연수에 대한 공리를 세웠다고 한다. 공리란-수학이나 논리학 등에서 증명이 없이 저절로 알만큼 명백한 진리.자연수에 대한 페이노 정리는 다음과 같다.
*1∈N *x∈N 이면 x+∈N이다. *모든x∈N에 대하여, x+≠1이다. *x≠y이면 x+≠y+이다.
*(1)1∈xX이면 (2) x∈X이면, x+∈이다.X=N이다.
순서대로 풀어보면 1은 가장 작은 자연수이다. 자연수에 1를 더한 바로 뒤의 원소도 자연수이며, 서로 다른 두 자연수의 바로 뒤 원소는 서로 다르다. 어떤 성질이 1에 대하여 성립하고, 또 자연수 x에 대하여 성립할 때 x의 바로 뒤 원소에 대하여도 성립한다면, 그 성질은 모든 자연수에 성립한다.
수학은 단 한 개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 듯 하다. 매번 읽기가 싫지만, 매번 또 읽어볼 만한 매력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는 수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수학책을 읽는다. 철학이나 소설을 읽듯이.
“어떤 체계 내에서 그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그 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 밝힐 수 없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감탄을 자아낼 만한 정리다. 수학은 단순하지 않다. 수학이 단순해 보인다면 그 이유는 그 대부분을 그 아래에 감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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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말한다. "여전히 나의 1순위는 재미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재미'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하게 불쾌한 작품.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늙은 선생과 어린 학생의 성관계를 다루고 있어서 인지, 어린 학생을 제 손아귀에 넣고 맘대로 주무르는 어른의 행태 때문인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도구 취급하는 사람들의 행태 때문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은 너무도 불쾌하고 최악의 형태로 그려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유가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 때문이라면, 상상도 못할 그 반전 때문이라면 더더욱 이 작품은 내가 읽었던 그 모든 작품 중 최악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선생과 미성년자의 부적절한 관계를 '반전'이라는 말로 개연성을 받으려 한 작가의 행태가 너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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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부터 시작된 사계절의 절반이 지나가고 다가온 가을의 이야기. 둘이 함께였던 것이 당연했지만, 그 당연함을 뒤로 하고 각자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한 학기 동안 그들의 소시민적 행위들이 돋보임. 그러나 극 대부분에 걸쳐 둘은 결코 소시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듯 언제라도 사건이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깔려있음. 그 긴장감은 서로의 연인으로 인해 격정을 맞이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본래의 형태를 되찾음.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둘이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함. 둘은 서로에 의해 존재하며, 서로에 의해 파괴되는 아이러니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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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리즈와는 달리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사건과 전개로 이뤄짐. 오나사이와 고바토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시즌이었다고 생각함. 특히 오나사이의 조금은 뒤틀린 듯한 성격과 특성을 잘 이끌어냈으며, 둘이 왜 소시민이 되고자 하는지에 대해 독자에게도 다시금 부각시켜줌. 소시민이 되고자 서로를 다독이며 지냈던 둘이 헤어진 이후, 둘은 진정 소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될지, 아니면 자신의 특성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시민 답지 않은 행동을 계속할지에 대한 궁금증이 유발되며 다음 시리즈가 기대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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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눈에 그려지는 전개와 소시민이 되고자 하는 두 비범한 아이들의 사건들은 흥미롭게 진행된다. 그러나 담담하게 서술되어지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와 추론, 추리하는 것에 특화된 주인공이라는 특성을 잘 살리지는 못한 채로 끝이 나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소시민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자의 시선을 단번에 확 끌어당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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