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이용자들과 내가 읽은 도서를 추천하고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공간입니다.
  • 책을 읽고 느낀 감정, 소감 등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본인 및 타인의 개인정보(이메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주소 등)가 게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타인의 명예훼손, 상업적 광고, 불건전한 내용 등 도서관 성격에 맞지 않는 내용의 글은 관리자에 의해 본인의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자료 검색 영역
  • (러셀이 들려주는) 명제와 논리 이야기
    저자
    황선희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11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3.16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러셀이 들려주는 명제와 논리 이야기>> 황선희 지음. 자음과 모음.

    //수학은 진실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조각품의 아름다움과 같이 우리의 나약한 감정의 어떠한 부분에도 호소하지 않고 그림이나 음악과 같이 화려한 장식도 없지만, 최고로 순수하고 단지 최고의 예술만을 보여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완벽성을 갖고 있는 냉정하고 준엄한 아름다움이다// 러셀의 <<신비주의와 논리학>>1918중에서.

    이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다’ 쿠테타가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나 기관’들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혹시 그들의 ‘맞을 짓’의 근거를 찾고 있는 것일까? 엄밀한 판단 기준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지 않을까. 총을 들고 국회로 난입하고, 평시에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에 때렸다는 사랑의 고귀함?이 아니라, ‘폭행했다’는 냉정하고 준엄한 판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 대립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어떤 편을 지지하든 ‘문제가 있다’라는 평가는 비슷해 보인다. 한 가지는 ‘극우’나 ‘파시즘’적 해결 방법, 한 가지는 ‘민주주의적 해결 방법’인 듯하다. ‘민주주의 강화’냐 아니면 ‘파시즘’을 통한 해결 방법이냐? ‘민주주의’는 그 ‘형식’에 우선 방점이 있고, ‘파시즘’은 그 ‘내용’에 우선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는 왜 내 사랑을 진실을 몰라주냐고 아우성이고, 어떤 이는 사랑의 ‘형식’을 준수하려 하는 듯 하다. 수학은 나약한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화려한 장식도 없지만, 냉정하고 준엄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것이 순수하고 최고의 예술이라고 한다. 전에 /허드슨강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비행사고에 대한 처리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들은 연민의 감정도 없고, 화려한 수식도 그 흔한 ‘진정성’도 없이 제도나 시스템과 ‘형식’으로 사건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였다. ‘냉정하고 준엄한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들이 부대끼는 세상에서 이런 ‘준엄하고 냉정한 아름다움’이 이루어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 제도/는 이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러셀은 철학자, 수학자, 작가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하면 수학을 논리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즉 수학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걸 기호논리학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이는 수학과 논리학을 서로 연결하려는 시도라고 한다. 그의 논리학을 약간이라도 맛보기 위해서는 ‘개념’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개념’은 논리학을 위한 도구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트가 아니라, 내가 이해하기 위한 용도의 노트니, 한 번 더 옮겨봄으로써 한 번 더 읽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 인용을 주로 해본다. 한국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먼저 그 사건을 헌법에 물어야 한다. 나의 감정이나 판단이 아니다. ‘인용’은 이런 효과가 있기에 중요하다.

    명제란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문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문장은 의문문, 감탄문, 명령문, 서술문 네 가지로 구분된다. 명제, 즉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문장은 서술문뿐이다. 그래서 나머지 문장에 대해서는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 수학은 참과 거짓을 명백하게 구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한다. 감탄문 등은 수학적인 판단이 불가한 영역이라 한다. 주어진 문장이나 식이 명제인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이면----이다’와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명제의 형식이라고 한다. 명제는 이 형식을 충족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형식은 가정과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이면’은 가정, ‘----이다’는 결론이다.

    증명이란? 주어진 수식이나 문장(명제)이 참인지 확인하는 방법을 증명, 거짓인지 확인하는 방법을 반례라고 한다. 증명이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성질을 근거로 하여 이론적으로 어떤 명제가 참임을 밝히는 과정, 참임이 밝혀진 명제 중에서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을 정리, 정의란, 용어의 뜻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 공리란, 증명하지 않고도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 그런데 반례는 명제가 거짓임을 밝히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정의나 다른 명제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증명이 아니라 반례라고 한다. 반례는 단 하나라도 거짓인 예가 발견되면 거짓이 된다고 한다. 수학에서 거짓은 단 하나만 발견되어도 그 명제는 부정된다고 한다. 명제를 증명할 때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른다고 한다. 1-추측한 사실을 명제로 만든다. 2-명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가정과 결론을 기호로 나타낸다. 3-정의, 정리, 성질 등을 생각하며 체계적으로 설명해 나간다. /어떤 명제가 참임이 증명되면 그 참인 명제를 이용하여 또 다른 명제가 참임을 밝힐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수학적 지식은 참인 명제들의 연쇄이며, 반복하고 축적되면서 등장하게 된다고 한다. 이 명제의 연쇄에서 한 명제가 거짓으로 밝혀지면 그 후 모든 수학적 지식은 거짓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위대한 수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이후 두려움에 발표를 미루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이유라고 한다. 만약 쿠테타가 기각이 되면 단지 하나의 명제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의 연쇄가 무너지게 된다. 이제 ‘데이트 폭력’을 처벌할 근거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폭력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사랑의 진정성’이라는 내용만 남는다면. ‘내가 그,그녀를 진정 사랑하였기에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만을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면.

    명제와 집합. 집합이란 어떤 조건에 의하여 그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의 모임을 말한다고 한다. 이 집합의 개념이 상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런 집합의 개념을 정의한 수학자는 칸토어라고 한다. ‘개념’이란 원래부터 있던 자연발생적인 정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념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칸토어의 집합 정의는 /우리의 직관이나 사고 가운데 명확하고 잘 구분되는 대상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놓은 것/ 이다. 그럼 명제와 집합은 어떤 관계가 있을가? 참인 명제를 가정과 결론으로 나누었을 때 가정에 해당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을 p, 결론에 해당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을 q라고 하면, p는 q의 부분집합이 된다.
    p⊂Q, 반대는 P⊄Q로 기호로 표시할 수 있다고 한다. ⊄,⊂은 집합의 기호이다. 수학에는 전제 조건들이 많이도 있어 보인다. ‘어떤 조건’,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모임’ 등. 어떤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한다는 의미는 우선 문제를 이런 식으로 명확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런 작업이 없는 문제에 대해 수학자는 침묵하든지, 어떻게든 수학적 엄밀성 즉 명제로 만들어내야 한다. 명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논리학의 시작이 아닐까?

    명제의 역, 이 대우. 역이란, 명제의 가정과 결론을 바꾼는 위치 변경. 이란, 가정과 결론을 부정한다. 대우란, 가정과 결론을 부정하고 그 위치를 바꾼다. 명제를 가지고 놀이를 하고 , 또 그런 관계들을 바꾸어서 새로운 명제들을 만든다. 즉 역의 이, 대우. 이의 역, 대우. 대우의 역, 이 등을 계속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명제가 참이면 역, 이, 대우 모두 참인가? 명제가 거짓이면 역, 이, 대우 모두 거짓인가 아닌가? 명제의 역, 이, 대우를 만드는 것이 사실은 논리학이지 않을가? 질문을 만드는 능력, 하나의 명제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 등. 기호로 나타내면 1-P⊂Q (참인 명제) 2-Q⊂P(명제의 역) 3-Pⁿ⊂Qⁿ (명제의 이. ⁿ은 여집합) 4-Qⁿ⊂Pⁿ(명제의 대우) 이 관계의 참, 거짓을 어떻게 알까. 기호만 보고 알기는 어렵다. 이것을 벤다이그램으로 그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집합의 개념으로 증명할 수 있다.
    명제가 참이면, 역과 이는 거짓, 대우는 참이 된다고 한다. 원래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기가 어려울 때 우리는 대우가 참임을 증명하여 원래 명제가 참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명제‘a²이 짝수이면 a는 짝수이다’ 대신 대우’a가 짝수가 아니면 a²은 짝수가 아니다‘ 즉 a가 홀수이면 a²은 홀수이다’을 증명하면 된다고 한다. 철학자들이나 논리학자들이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왜 그렇게 요란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외에도 귀납적 추론, 연역적 추론, 귀류법, 수학적 귀납법 등 수학적 방법을 논리학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러셀의 논리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패러독스라고 한다. 패러독스는 러셀이 발견한 새로운 논리학이라고 한다. 흔히 논리학은 ‘A는 A이다’와 같은 참인 명제는 참이라는 동일률, 어떤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모순율, 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배중률 세 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패러독스는 세 가지 법칙 중에서 모순율과 배중률을 어기고 있고, 명백하게 타당한 추론을 하더라도 모순되는 두 개의 결론을 얻게 된다고 한다.
    러셀의 패러독스에 대한 정의는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을 N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 집합 N은 그 자신의 원소가 될까, 아니면 원소가 될 수 없을까//

    무슨 소리인지. 이처럼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문장이 패러독스라고 한다. 이 패러독스가 가져단 준 혼란은 엄청났다고 합니다. 나는 이 패러독스의 문장을 해독도 할 수 없어 쪽지에 접어서 지갑에 넣었다. 생각나면 꺼내보아야겠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외워버려야겠다.
    즐거운 하루였다. 어촌에서 평생 살았던 시골 아낙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재밌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 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저자
    이졸데 카림 지음 ; 이승희 옮김
    출판사
    민음사
    발행연도
    2019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3.06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나르시시즘의 고통>>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민음사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인류는 나르시시즘을 제어하기 위해 엄청난 자원을 사용하고 제도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자기애라고도 이기주의라고도 나르시시즘이라고도 불리는 이데올로기를 통제하고 제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은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졸데 카림에 의하면 지금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에서는 나르시시즘을 부추기고 장려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은 이제 주류의 사회적 형식이나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개인에게도 수 많은 성질과 심리와 성격이 있는데, 어떤 특정한 성격이 부각되고 장려되고 부추겨지는 것에 비유될 수 있어 보인다. 고도로 발달한 경쟁적인 자본주의와 나르시시즘은 짝을 이룬다고 한다. 이졸데 카림은 호명(calling)이나 상상적 관계 등을 통해 나르시시즘의 도래를 해석하려고 하는 듯하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부름(calling)을 받은 개인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 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호명(이졸데 카림은 호명이라 하고 철학자 알튀제르의 정의를 차용한다)이 있고 그 호명에 반응한다. 호명과 반응을 ‘상상적 관계’ 맺기라고 하는 듯하다. 호명이 있고, 호명을 받은 ‘주체’가 있다. 주체가 호명에 반응하여 맺는 관계가 상상적 관계이고 이 상상적 관계가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듯하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라 하면 나쁜 생각이나 일시적 느낌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데올로기는 세계에 나를 연루시키는 강력한 상상적 실재적 매듭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 우리가 세계와 연관을 맺는 방식이 이데올로기 혹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발전한 자본주의와 ‘주체’가 맺는 ‘상상적 관계’ 혹은 이데올로기 혹은 성격이나 심리를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듯하다. 혹은 경쟁적인 자본주의의 호명을 받은 ‘주체’가 살아가기 위해 채택하고 매달리는 것이 나르시시즘이라고도 하는 듯하다. 조금 과장하면 물에 빠진 주체가 잡고 있는 지푸라기가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듯도 하고, 물에 빠진 주체와 지푸라기가 맺는 상상적 관계가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듯 하다.. 우리는 지금 나르시시즘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두 달이 넘게 이 책을 끼고 있다. 여러 번 반복하여 읽었기에 ‘듯 하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내 나름의 고육책이다. 몇 자 적자고 이 책을 다시 뒤적거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싶지 않다. 미로 속을 또 다시 헤매는 수고도, 심리적 자괴감이나 수치 혹은 나를 ‘객관적’으로 정면에서 응시하는 한 여름의 뙤약볕에 세워두기 싫다. 나름 감춰주고 숨을 수 있는 그늘 속에 의탁하고 싶은 심리도 있다. 어쩌면 이런 관계가 태양이라는 호명을 받은 내가 태양과 맺는 상상적 관계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한 번 더 뒤적거린다고 지금보다 나아지리란 보장도 없기에 ‘듯 하다’로 나의 무능한 독해를 감추고자 한다. 나의 ‘듯 하다’는 전혀 신뢰할 수 없기에 혹 이 책에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있다면 직접 읽어보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어차피 나르시시즘이 점령한 세상에서는, 각자의 감정과 느낌이 기준이고,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선언하면 아니기에 사실 이런 언급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다소 주제에 어긋나지만, 지금의 ‘쿠테타’ 사건과 진행을 보며 많은 평자들은 ‘파시즘’이나 ‘극우’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런저런 해석을 시도하지만, 그 저변에는 ‘나르시시즘’이 짙게 깔려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즉 내가 그렇게 느끼면 옳다. 내 감정이 기준이다. 헌법 위반인지, 혹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배반인지 따위가 아니라, 단지 나의 감정과 느낌이 그렇다고 선언해 버리면 되는 식이다. 나르시시즘에서 가장 중요한 엔진은 사실 ‘감정’ 혹은 ‘느낌’ 이라고 한다.

    이 책을 전부 개관할 수 없기에 우선 저자가 드는 나르시시즘의 현상을 개괄해 보고, 결론에 해당 될 수 있는 6장 나르시시즘의 도덕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그러나 6장을 읽기 위해서는 5장까지의 기나긴 미로를 통과해야 한다. 철학은 신내림이나 계시나 깨달음처럼 단박에 얻을 수 있는 종교나 영성이 없기에 기나긴 논증, 논쟁, 비판, 회의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깨침’이나 ‘각성’이 아니라, ‘사유’가 필요하다. 철학의 어려움이자 매력이 아닐까도 싶다. 우리 중 대부분은 자신이 나르키스트가 아니라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이런 주장은 예전의 도덕일 뿐이다. 우리 시대의 ‘도덕’은 나르시시즘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나르키스트가 되어야 한다’가 이 시대의 도덕이 아닐까? 나르키스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다. 어디서나 이런 주장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라? 이것이 호명이고 부름이고 부추김이다. “네가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가 아니다. 혹자가 이렇게 주장한다.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말이 언 듯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모순적이다. 나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부딪칠 때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난감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라는 주장일 뿐이다. ‘자기애’가 뭐가 문제인가? 언제나 문제는 사회적이다. 무인도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주제도 논증의 대상도 아니다. 사실 나르시시즘이 성립할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나르시시즘은 ‘순수한 형식’의 자기애가 아니라 그래서 ‘사회적 형식’이다. 이졸데 카림에 의하면 발전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에 맞는 도덕율은 ‘자신을 사랑하라’이고 우리 모두 나르키스트가 되자다. 우리가 호명을 받았든 강요를 받았든 부추김을 받았든 지금 사회의 사회적 형식은 혹은 성격은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자신과 관련시키는, 항상 내가 대상이라고 느끼는 중심화, 경쟁 저편의 고유 가치, 자아 충만의 환상, 나-지금-여기을 절대적으로 설정.// 자기 배려, 자기 테크놀리지, 자기 계발 더 향상된 나 등에 강박적으로 메달린다.

    //본인이 시스템의 톱니바퀴라고 여길 수가 없다. 내지는 만일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을 견딜 수가 없다. 즉 견딜 만한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그러니까 우리는 행위자가 아니라 주체다. 톱니바퀴가 아니라 행동하는 자다. 하지만 이 상상적 관계는 자기 관계일 뿐 아니라 세계 관계이기도 하다. 즉 세계와 맺는 개인적 관계다.---자신을 톱니바퀴로 상상하고 느낀다면 우리는 톱니바퀴로 기능할 수가 없다.--우리가 얼마나 상상적이든 간에 우리 자신을 주체로 경험해야 톱니바퀴로 기능할 수 있다.//
    //우리의 사회적 실존이 이러한 분열을 필요로 하고 또 장려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분열된 존재다. 우리 모두 행위자이자 행동하는 자, 수동적으로 매인 자이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자, 우리는 현실적 실존 조건이라는 외부의 필요성에 끼워 맞춰지고, 상상적인 것이라는 ‘자기의’ 필요성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실존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논리다.//

    저자는 이것을 자발적 복종의 거대한 공식이라고 한다. 우리의 실존적 조건은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톱나바퀴다. 그런데 그 톱니바퀴라고 느낀다면 삶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적 관계 맺기를 한다. 내가 ‘주체’이자 행동하는 자라는 자기 관계, 세계 관계를 상상한다. 즉 세계와 내가 상상적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모순되게 자신을 톱니바퀴로 여기면 톱니바퀴로 기능할 수가 없다. 해서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 경험한다. 수동적으로 매인 자이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자가 된다. 즉 톱니바퀴인데 톱니바퀴가 아닌 자로 상상한다. 그래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톱니바퀴를 선택했노라 자부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톱니바퀴를 굴린다. 이런 공식을 저자는 자발적 복종이라 한다.

    //경쟁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무엇, 경쟁을 넘어서는 무엇은 성스럽다. 자기 준거성은 성스럽다.----유일무이함은 독자적인 충만함의 전망을 제시하며, 개인에게 피난처를 약속한다. 그곳에서 주체는 무한 경쟁에서 보호되고 가차 없는 경쟁에서 구원된다. ---나르시즘의 핵심은 교환 불가능함, 비교 불가능함이며 바로 유일무이함이다.// 우리는 이 거대한 톱니바퀴를 벗어나기 위해, 무한 경쟁에서 보호받기 위하여 나르시시즘을 장착한다. 나르시시즘의 핵심은 바로 자기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런데 경쟁에서 벗어나는 것, 고유 가치가 되는 것, 이것이 경쟁의 쟁점이라 한다.//나르시시즘 신화를 통해 경쟁에 새로운 형태를 덧쒸우는 것이다.---유일무이함은 우리가 이 교환 가능성을 살아가는 방식이다.---경쟁의 저편이라는 신화가 바로 이 경쟁에서 최고의 동력이다// 경쟁을 회피하기 위한 유일무이함의 추구가 바로 경쟁의 심화와 경쟁의 다른 행태가 되었다. 각자가 모두들 유일무이함을 향해 내달리고, 고유 가치를 찾는다는 것이 바로 경쟁의 심화이자 엔진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만 아는 레시피, 맛집, 가치, 고유의 습관 등등이 경쟁적으로 경쟁하고 있다. 유일무이함은 사실은 ‘현대’에서 가련한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 방식일 뿐이다.

    주말 아침에 전날 피로가 풀리지 않아 낮잠을 즐기고 싶은데, 자기 테크놀리지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공들여 자신을 가꾸고 명상 센터로 차를 몬다.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뿌듯함이 있다. 나는 나에게 명상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매주 나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고단하다. 때로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고통이지만,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에 고통을 즐거움이라 여기기로 한다. 나는 자발적으로 이 규칙과 룰에 복종한다. 규칙과 룰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했고, 그래서 나는 복종한다. 우리는 자기 배려, 자기 테크놀로지, 자기에게 충만감을 주느라 모두들 고달프다. //오늘날에는 자발적 예속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복종하는 자는 주인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종하는 자는 오히려 관계에 순응한다. 그는 자신을 끼워 맞춘다.--이 복종은 오히려 동의로 체험된다. ---복종이 권능 부여(역량 강화, 임파워먼트 등)로 체험되는 것이다.---그것은 기존 질서를, 기존 관계를 유지하고 떠받치고 영속화하는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효율적인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노력들은 새로운 질서나,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기존 관계를 영속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형식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제자리에서 아무리 높이뛰기를 해봐야 기존의 땅만 단단하게 할 뿐인 것이라고 한다. 쉬지않고 경쟁적으로 뜀박질을 하느라고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다.

    제 6장은 이 책의 결론 부분이다. 제목은 나르시시즘적 ‘도덕’이다. 도덕에 따움표를 붙였다. 이 장에서는 ‘도덕’과 ‘윤리’를 구별하고, ‘윤리’로서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우리 시대의 ‘도덕’이 되어가는지를 살펴본다. 도덕은 초자아(프로이트 정신분석한 용어)와 관계하고 윤리는 자아이상(자아가 내면에 품은 이상)과 연결된다고 한다. 초자아는 외부의 강제력이고, 자아이상은 ‘자기 자신의 완성’인 ‘자기를 겨냥한 실천’이라 한다.. 초자아 아래 도덕은 법의 영역이고, 자아이상의 윤리는 규칙과 태도나 자세라고 한다. 도덕을 어겼을 때는 죄를 받고 개인은 죄책감을 느낀다고 한다. 윤리를 어겼을 때는 열등감이나 자괴감을 느낀다고 한다. 도덕은 자기 포기가 구원의 전제 조건이고, 윤리는 자기 배려에 방점을 찍는다고 한다. 도덕의 준수는 외부의 강력한 권위의 힘이고, 윤리란 내면화된 규정으로 자발적 복종의 강제라고 한다. 저자는 지금은 도덕이나 초자아가 약해지고, 자아이상의 윤리가 우세해졌다고 한다. 도덕은 이제 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은 자아가 스스로 만든 이상을 따른다고 한다. 옛 유물인 ‘양심’은 이제 사람들의 행동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즉 너는 “양심도 없냐” 하는 질책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초자아(신, 영웅, 법, 지도자 등)의 침식, 도덕법의 침식, 처벌하는 양심의 침식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는 바깥으로 가는 발걸음, 즉 새로운 초자아나 도덕이 아니라 자아이상의 강화로 대체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아이상의 지배는 도덕적 법칙성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규칙을 통해 인도된다고 한다. 이를 도덕과 윤리의 차이에서 결정적인 대립이라고 한다./규칙은 (스스로) 고안한 기준이다./ 거기에는 정해진 표지와 방향의 보증 없이, 하지만 처벌하는 옛 심급의 권위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스스로 고안한 규칙을 따르는가? 저자는 지젝을 인용한다. //도착증자(도착은 병리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는 세계 관계를 일컫음.)가----규칙을 정하는 것은 그의 정신적 우주에서 기초를 이루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즉 이 규칙은 일종의 대체 법으로 기능한다/ 저자는 우리의 규칙이 혹은 나의 규칙이 나르시시즘적 윤리를 가상 도덕으로 만든다고 한다. 즉 따라야 하고 지켜야 할 법이 없기에 우리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서 이것을 ‘도덕’으로 만든다고 한다. 옛 도덕이 사라진 자리에 나르시시즘적 윤리를 규칙으로 만들어 이 규칙을 따른다고 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도덕법의 몰락은 자유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지배라고 한다. 규칙에 대한 복종. 규칙은 금지의 특징이 아니라 허락하는 충족, 더 나아가 요구되는 충족, 즉 이상 충족의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상은 도달 불가능하고, 지속적인 이행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즉 이상은 그래서 이상일지 모른다. 이상 대신 꿈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꿈은 도달 불가능하고, 설령 도달하였더라도 이행이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규칙이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 /불가능한 이상 충족은 이로써 가능한 규칙 충족으로 전위된다. 그리하여 규칙은 도달 불가능한 이상의 번역이 되고 이상적 수단이 된다. 달리 말해 규칙을 따르는 것은 이상의 대체가 된다/ 우리는 도달 불가능한 꿈(이상) 대신 규칙을 잘 준수하는 것이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 규칙(나의 규칙, 내가 만든 규칙)에 자발적 복종을 함으로써 이상이 충족되었다는 착각을 한다. 지젝에 의하면 우리는 도착증자가 된다. 꿈(이상)이 아니라 규칙을 따르기에 도착증이다.
    /수양이란 늘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제 생산적인 것이 된다. 즉 우리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실적 개선, 향상의 의미뿐 아니라 인증의 의미까지도, 수양의 고통, 내 규칙의 괴로움은 내가 이상에 근접했음을 인증한다/ 고로 /규칙은 우리의 나르시시즘적 보증이다/ /규칙을 따르는 게 만족인 동시에 복종인 이상의 지배/

    나르시시즘적 ‘도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위반이 아니라 실패를 벌하고, 죄가 아니라 열등함이 문제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의식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문제가 된다. 죄는 그 행위에 관여하지만 부끄러움은 전인적으로 관여한다. /오늘날의 결핍은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이상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은 도달 불가능함 때문에 실패는 불가피하다고 한다. /실패는 구조적이다/ 그래서 이 도덕은 선과 악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을 구별한다. 좋음과 나쁨의 구별은 나 자신의 척도다. 즉 보편적 척도가 아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것은 좋음이고 나쁜 것은 그냥 나쁨이다. /나르시시즘의 시대의 윤리적 좋음은 허락된 자기 긍정이다/ ‘외부 규제’로 나의 규칙이 아닌 규칙으로 생각되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그것은 자기성의 도취, ‘나는 나다’라는 동어 반복의 도취다.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 복종이다. 즉 역략 강화로 체험되는 복종이다. 우리의 복종은 나르시시즘의 복종이며 나르시시즘적 ‘도덕’의 복종이다. 나르시시즘적 ‘도덕’은 일련의 모순으로 입증되었다. 그거은 도덕적으로 반도덕적 원리다. 사회성으로서 반사회적 원리다. 인정을 필요로 하는 자기 정립이다. 그리고 그 인정은 반향(메아리)일 뿐이다// 메아리 즉 자기 목소리에 도취된 자아.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라 보에시의 혁명의 가능성도 없고, 헤겔의 변증법적 낙관주의도 없다고 한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의 이데올로기가 막다른 골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뿐이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르시시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지평이나 사상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임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탈출구를 모색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책들은 나를 미로 속에 가두고 팽개쳐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끝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밖에.

  • (로바체프스키가 들려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이야기
    저자
    송정화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11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2.22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로바체프스키가 들려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이야기>> 자음과 모음. 송정희 지음

    도서관 반납 일자가 오늘이다. 기한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마냥 연기되었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기한이 정해져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무한히 연기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까? 읽은 지 꽤 오래되어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늘이 대출 마감이라 억지를 부려본다. 반납하고 새 책을 대출하는 즐거움이 약간 있다. 벌써 11권째를 읽었고 앞으로 얼마를 더 읽어야 할지 알 수 없고, 더 읽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지 다른 대책은 없다. 삶도 책도 수학도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달이 뜬 밤에 각자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달은 관점과 느낌과 당시의 감정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다. 풍경을 나와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사람 수만큼 달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학에서 달은 우리네 삶과 무관한 자리에 ‘물질’로서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감정과 느낌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우리의 외부에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 자체의 규칙과 운동을 지속할 뿐이다. 그 풍경이 외부의 전경이 나와 무관하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싶다. 그렇지만 나와 외부를 분리했을 때 얻는 이득도 있고, 다른 매력도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전에 읽은 수학은 벌써 잊어버렸다. 시험를 치르기 위해서도 읽지 않고 읽는 이유가 특별히 없다. 하지만 ‘수학적 사고’가 은연중 습득되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생각’하는 즐거움이 있고 이득이 있다면, 그 즐거움을 위해 생각하는 ‘방법’을 익히고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가.


    유클리드 기하학은 2,000여 년간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여겨져 왔다고 한다. 하지만 1823년 평행선 공준이 성립하거나 성립하지 않음에 따라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나눠졌다고 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의 기하학이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구부러진 평면과 구부러진 공간, 즉 지구가 평평한 공간이 아니라는 발견과 괘를 같이 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세 명의 수학자- 로바체프스키,볼리아이, 가우스-는 비슷한 발견을 하였지만, 차마 발표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00년 간의 절대불변의 진리에 대항하기를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발표 이후에도 사람들은 냉담했고, 견디기 힘든 비난을 들었다고 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23가지의 용어를 정의했고, 5개의 공리와 공준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 정의와 공준과, 공리는 증명할 수 없는 가정이라고 한다. 이것은 약속이고, 규칙이고 개념이다. 이런 약속과 규칙과 개념이 있었기에 수학은 시작될 수 있었다고 한다. 몇 가지 정의를 소개하면 이런 식이다. 1-점은 부분(넓이)이 없는 것이다. 2-선은 나비(폭, 두께)가 없는 것이다.-------23-평행선이란, 동일한 평면위에 있고, 쌍방을 아무리 연장하여도 어느 방향에서도 만나지 않는 두 직선을 말한다. 공리는 1-동일한 것과 같은 것들은 서로 같다.-----5-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공준은 1-한 점에서 다른 점에 직선을 그을 수 있다.4-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등이다. 그리고 23개의 정의와, 5개의 공리와 공준을 가지고 465개의 명제를 증명하였다고 한다. 명제1를 이 정의와 공리와 공준으로 증명하고, 명제2를 만들고 정의와 공리와 공준 명제1를 이용하여 증명하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명제 465개를 논리적 추론만으로 증명하였다고 한다. ‘논리적인 체계만으로 추론되었다는 점이 바로 유클리드 원론이 수학에서 원형이 된 이유’라고 한다. 명제 465개를 이런 식의 논리적 추론만으로 증명하였다니!

    그런데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계기는 바로 5번재 공준인 평행선 공준이었다고 한다. 평행선 공준을 수정해서 만든 기하학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 한다. 5번 째 공준은 –직선 L과 그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점 P가 주어졌을 때, 점P를 지나서 직선L과 평행인 직선은 단 한 개만 존재한다. 이 평행선 공준 5는 구부러진 곡면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연구가 있었다고 한다. 즉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준은 평면에서만 성립한다. 곡면이란 평평한 면과는 달리 구부러진 면이다. 그래서 –쌍곡면 위에서는 직선 L과 L위에 있지 않은 점 P가 주어질 때, 점 P를 지나서 직선 L과 평행한 직선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가우스, 로바체프스키, 볼리아이.
    -구면 위에서는 직선 L과 L위에 있지 않은 점 P가 주어질 때, 점 P를 지나서 직선 L과 평행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리만. 이렇게 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인 쌍곡 기하학과, 구면 기하학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30년 후에 리만이라는 수학자가 공간을 분류하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는 공간을 수학적으로 제시한 이후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지만 불가능한 방법은 쌍곡면이나 구면(원)에서 실제로 두 평행선을 그려서 무한히 늘려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누구도 시도해볼 수 없는 방법이다. 공간은 무한대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리만이라는 수학자가 공간을 분류하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는 공간을 제시한 후에 증명 가능하였다고 한다. 즉 쌍곡면에서는 평행한 직선이 무수히 존재하고, 구면에서는 평행한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수학의 힘이 아닐까? 경험이나 체험이나 실험이 아니라, 추론, 논리, 증명의 힘이 아닐까. 추론이나, 논리 체계, 증명이라는 수학적 방법이 없었다면 세계는 우리가 밥 먹고, 자고, 눕고, 발이 닿는 장소가 우리의 세계의 전부일지 모른다. 네 번재 수업은 –두 점을 최단 거리로 잇는 선은 항상 직선은 아니다. 다섯 번째 수업- 곡면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여섯 번째 수업- 곡선에서 구부러진 정도를 어떻게 나타내지요. 일곱 번째 수업- 곡면의 곡률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살렸다. 여덟 번째 수업- 쌍곡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어떻게 달라요. 아홉 번째 수업-구면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어떻게 달라요. 이다. 내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수업이지만, 제목이라도 써보는 것이다. 한 번 제목이라도 서보는 것이다.

  • (피보나치가 들려주는) 피보나치수열 이야기
    저자
    오혜정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11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2.09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피보나치가 들려주는 피보나치수열 이야기>> 자음과 모음. 오혜정 지음.

    피보나치는 1175년에 태어나 1250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는 <산반서>라는 책을 통해 인도-아라비아 수 체계(현재 사용하고 있는 수 체계)를 유럽에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수열이란 어떤 규칙에 따라 숫자를 나열해 놓은 것이라 한다. 2,4,6,8,10—은 앞의 수에 2를 더하면 다음 수가 되도록 나열해 놓은 것이고, 1,3,9,27---은 앞의 수에 3을 곱하면 다음 수가 되도록 나열해 놓은 것이다. 이를 수열이라고 한다. 1,1,2,3,5,8,13,21,34,55,---가 피나보치수열이다. 연속하여 나타난 두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규칙을 가진 수열을 피보나치수열이다. 세상에는 피나보치수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규칙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수열을 만들 수 있다. 수열이 되기 위해서는 숫자 하나로는 열이 만들어질 수 없기에 숫자 여럿이 있어야 한다. 그 집합에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숫자들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숫자에 어떤 질서가 수열이 아닐까? 지금 제시된 피나보치수열이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에는 더 많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피나보치라는 수학자가 단지 호기심으로 이 수열을 만들었는지, 혹은 수를 가지고 장난을 한 것일가? 아님 피나보치수열이 자연이나 우주의 어떤 질서를 수로 표현했을까?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의 아름다움이 무리수를 동행한 황금비로 이해되고, 풀꽃들의 조화가 피나보치 수 1, 1, 2, 3, 5, 8, 13, ---로 해석되며/ 라고 인용하였다. 이것을 보면 피나모치수열이 단지 장난은 아니지 싶다. 세상(자연이나, 우주. 혹은 다른 것)을 피나보치수열로 해석이나 설명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님 피나보치수열로 구성되었다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수열은 수의 규칙과 질서를 의미하고, 아름답다는 황금비 또한 수로 나타낼 수 있는 비율이다. 어쩌면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질서나 규칙 혹은 비율을 의미하고, 미적 감식안이란 그런 질서를 볼 수 있는 안목일까.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그 자체의 질서가 아닐까. 장미가 왜 아름다운가? 아니 꽃은 왜 아름다운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럼 적어도 수학적으로 장미꽃 속의 피나보치수열의 완벽한 배치를 보아라. 아름답지 않는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람따라 흘러가고 시시각각 모양이 변하는 구름에 아무런 규칙과 질서가 없을까. 관점과 사람에 따라 구름이 달리 보이지 저기에 무슨 규칙이 있을 리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수의 규칙과 질서로 즉 수로 나타낼 수 있다. 단순한 예로 제멋대로인 구름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기에 일기예보가 가능하고, 그 예측은 수학적 기법을 사용해야만 가능하리라. 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황금비는 따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비율을 의미한다고 한다. 백 명의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의 사각형을 제시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각형을 찾으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황금비 직사각형을 지목한다는 주장이다. 황금비는 가로의 길이 : 세로의 길이 = 1.618--- : 1 비율이다. 가로세로를 한 선분으로 나타내면 (선분전체길이) : (긴 선분의 길이) =(긴 선분의 길이) : (짧은 선분의 길이)다. :는 비율을 나타낸다. 짧은 선분을 1이라 하고, 긴 선분을 x라 하면 선분 전체길이는 (1+x)다. 수학으로 나타내면 (1+x) : x =x :1 이고, 이 비례식을 이차 방정식으로 나타내면 x제곱-x-1=0이고, 이를 근의 공식을 이용하여 불면 a=1 ,b=-1, c=-1가 되며, 다시 공식에 대입하면 x는 1.618---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황금비율과 피나보치수열이 무슨 상관이 있을가. 피나보치 수열 1,1,2,3,5,8,13,21,34,55,89,144,233,377---- 앞 수와 뒷 수의 비율을(비율은 분수로 나타낼 수 있다) 구해보면 1/1=1, 2/1=2, 3/2=1.5, 5/3=1.666, 8/5=1.6, 13/8=1.625--, 21/13=1.615--,34/21=1.619--, 55/34=1.6176=--, 89/55= 1.618--- 그 값이 황금 비율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고 한다. /따라서 피나보치수열은 가장 아름다운 기하학적 비율인 황금 비율을 만들어 내며, 이 황금 비율은 수리적 비율로 나타내어지는, 미적 관계를 갖는 모든 것에서 관찰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수리적 비율로 나타낼 수 있는 나무의 가지치기, 해바라기 씨앗 배치, 솔방울 포의 배치 , 피라미드나 파르테논 신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미술과 사진 구도, 음악에서, 일상 생활용품, 주식시장 변동 예측, 토끼 한 쌍의 번식 예측, 등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것들에서 하나하나 피나보치 수열을 찾아보면 재미가 있을 듯 하지만, 여기에는 더 많은 수학적 지식과 응용이 있어야 가능해 보인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앉아서 국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각자 주장을 할 때, 누군가 이럴 것이 아니라 국화 꽃잎의 배치에서 피나보치수열을 찾아보자라고 제안해 볼 수 있지 않을가. 국화의 아름다움은 조화에 있고, 우리들의 아름다움도 조화에 있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하였다. 살아가는 일은 아무 이유 없는 활동을 8할 이상 해야 하는 일이다.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우리네 삶도 어떤 패턴이 있고, 어떤 질서나 규칙 아래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혹 모르지 내 삶도 수리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가급적 황금 비율, 피나보치수열로 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시리즈물을 읽다보면 수학적 사고가 내재화되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삶의 패턴을 만들 수 있을지.

  • 완전한 영혼
    저자
    정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발행연도
    2018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1.29
    평가점수
    평가점수

    3

    공감수

    <<완전한 영혼>> 정찬 소설잡. 문학과지성사

    1992년에 초판 1쇄가 발행되었다. 그 동안 평가가 좋았는지 2018년에 재판되었다. 여섯 편이 실렸는데, 소설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얼음의 집/을 읽기 위해 대출하였다. 며칠 전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글을 보고 읽고 싶었다. 정희진은 친절하지 않고 불편한 연구자다. 늘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정희진은 정찬 소설을 많이 인용한다. 소설가 정찬도 독자들을 매우 불편하게 한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은 무겁고 어둡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좀처럼 소설책을 구입하지 않는데, 가끔 정찬의 소설책은 구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소설을 많이 읽지도 않는다, 한 번 읽은 소설을 다시 읽는 일이 드물어서다. 하지만 정찬의 소설은 또여러 번 읽어야 할 것 같긴 하다. 1992년도 초판 해설은 문학평론가 홍정선이 맡았다. 그는 ‘권력과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라고 하였다. 신판 발문은 정희진이 발문하였다.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 체현의 윤리’라고 하였다. 두 평론가의 해설은 읽지 않았다. 큰 제목만 읽었다.

    /얼음의 집/은 1989년 히로이토 일왕의 부고 기사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1920년대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아버지는 하층 노동판을 전전하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살인 당한다. 살해를 운 좋게 피한 나는 무정부주의자 활동을 하다 천황 암살 모의라는 대역죄로 고문을 받다가 일본 최고의 고문기술자 하야시에게 후계자로 발탁된다. 시간은 흘러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데, 어느날 스승 하야시가 피습을 당하여 나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으로 간다. 하야시는 일본 최고의 고문기술자, 아니 기술자라기 보다는 고문의 장인이다. 고문을 예술로까지 승화시킨 자다. 소설은 세 명의 인물의 대화와 나의 회상으로 구성된다. 하야시는 에타(일본에서 최고 천민) 출신의 고문 기술자. 나는 조선인 출신(조센진) 하야시의 후계자. 기베는 일본 전통극 가부키의 대가이자 역시 에타 출신이다. 이들은 가장 천한 신분에서 가장 완벽한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이다. 천황의 명령을 받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천황이 되고자 한다. 현실에서 비록 여러 제약과 벽과 천황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 바깥의 존재, 스스로 권력자가 되고자 한다.

    “천황의 어깨 위에는 역사의 짐이 없다. 희생자의 살과 뼈가 산이 되어 쌓여도 천황의 어깨 위에는 티끌 한 점 쌓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권력자, 가장 완전한 모습이 천황이다” 스승 하야시와 가부키 예술가 기베는 가장 완벽한 권력자가 되고 싶었다. 가시도, 짐승의 눈빛도, 살과 뼈의 신음도, 상처와 증오의 아우성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권력자가 되고 싶어한다. 하야시는 고문에서 철저히 권력의 쾌락과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기베는 예술의 변신과 승화를 통해서, 나는 그런 하야시에게 후계자로서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권력과 욕망과 권력에 따른 쾌락은 권력과 욕망과 쾌락의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권력은 언젠가는 몰락하여 꺽여야 하고, 그곳에서 상처와 증오의 아우성이 끊임없는 장소이다. “쾌락을 받아들인 자들은 결국 무릎을 끓는다. 결국 벌거벗겨지며, 온몸이 쇠사슬로 감긴다. 누구에 의해? 무엇에 의해? 피투성이 역사에 의해, 쾌락을 추구한 자들이 쌓아올린 피와 살과 뼈에 의해” 그래서 가장 완벽한 권력인 천황의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구조와 운명에서 비껴날 수 있는 존재는 천황일 뿐이고, 그래서 천황의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황궁의 돌담 안쪽은 전혀 다른 세계다. 숲이 있고, 개울이 있고, 바위가 있고, 층을 이룬 꽃 위로 날아다는 나비가 있고, 바람이 있다. 돌담 바깥의 미친 듯한 소리도 거기서는 속삭이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요함과 평화로움만이 있는 곳, 그곳에서 천황은 식물을 키우고 버섯을 연구했다. 눈빛도 이빨도 없는 식물을”

    고문 기술자 하야시는 스스로 완벽한 권력자가 되기 위해 천황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내면과 삶을 ‘얼음의 집’으로 만든다. 그는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얼음의 정신은 따뜻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뜻함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얼음은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땅을 딛고 그늘 속에 서 있는 존재, 한 올의 햇빛도 용남할 수 없는 존재가 스승이었다” 스스로 천황(완벽한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야시가 얼음의 정신을 혹독하게 훈련하는 동안 현실의 권력자인 천황은 순수의 세계에서 순수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이 대비되는 내면은 원래 천황이었던 자와 에타나 조센진(천민이나 피지배자) 출신이 완벽한 권력자가 되고자 할 때의 정신, 내면의 정신적인 자세나 태도일지 모른다. 하야시는 “고문 대상자를 사물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창조한 권력의 새로운 불이다”라는 새로운 권력론을 제시한다. “이 생명체를 사물로 변신시킬 때 존재의 전락과 상승은 무화된다”. “쾌락을 지우면 지울수록 더욱 완벽한 도구가 된다.” “쾌락을 지운다는 것은 권력과 역사의 짐을 거부하는 행위다” “스승에게 삶의 바탕인 권력의 엄격한 규칙의 핵심은 살아남음이다”

    인간이란 권력과 쾌락과 욕망과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전쟁이 나면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폭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전염병이나 이상 기후로 예기치 않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천황 같은 완벽한 권력자, ‘내 삶의 주인은 나다’라는 권력자가 되기에는 인간들의 사회는 얼키고설킨 관계망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권력과 욕망과 쾌락과 운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냐가 고작이 아닐까 싶다. 어느 시대에나 인간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사상을 만들고, 어떤 인식 내용들을 체득한다.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팔자’론이나, 가부장제를 체현하며 삶을 견디며 살아남는다. 한국의 극우는 독재자 박정희를 마치 순수한 종교적 지도자로 만들려는 시도를 끊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신 천황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순수한 내면의, 무오류의 박정희의 이름으로 권력을 탐하고 피와 살과 뼈가 튀는 역사에서 쾌락과 욕망을 추구한다. 그렇게 천황과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에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대역죄이다. ‘신자유주의’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얼음의 집’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가. 권력과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격리시키고, ‘사랑’을 거부하고, 삶을 도구로 만들거나,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는 ‘자아’을 만들어서, ‘자아의 돌담 안쪽은 전혀 다른 세계다. 숲이 있고, 개울이 있고, 바위가 있고, 층을 이룬 꽃 위로 날아다는 나비가 있고, 바람이 있다. 돌담 바깥의 미친 듯한 소리도 거기서는 속삭이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요함과 평화로움만이 있는 곳, 그곳에서 자아은 식물을 키우고 버섯을 연구한다’. 담장 바깥이 아무리 시끄럽고 소란스러워도 나의 근육을 키우고, 강아지를 케어하고, 요가를 하여 정신 건강을 챙기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에타로 태어나거나 조센진으로 태어난 자, 금융 위기로 모두가 잘려나가 생계가 위태로울 때, 전쟁과 전염병으로 생사를 우연에 맡길 수 밖에 없을 때. ‘신자유주이 시대’의 무한 경쟁과 약육강식이 삶의 법칙이 될 때, 아무도 아무를 믿지 못할 때. 우리는 어쩌면 ‘얼음의 집’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얼음의 집의 유일한 목적은 ‘살아남음’일지도. 인간의 살과 뼈와 피로 이루어진 역사를 거부하고 삶을 하나의 사물이나 도구로 보기. 삶이란 나뭇조각이고 우리는 그 나뭇조각이라는 사물에 조각을 하는 예술가. 인공미의 세계. 스승 하야시는 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너는 아들을 갖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마치 유언처럼 한다. 스승 하야시는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아들이 나타났고, 그 아들에 의해 얼음의 집이 해체되기 시작했고, 끝내 아들에 의해 피습되어서 삶을 포기한다. 아들이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 아들을 갖지 말라고 했을까? 어쩌면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역사’를 ‘인간’을 거부하기를 바랐을가? 그처럼 완벽한 권력, 인공미를 추구하였던 이 고문 장인도 하지만 인간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는걸까?

1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