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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선 = (A)bilingual anthology of Tang poetry
    저자
    이병한 ; 이영주 [공]역해
    출판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발행연도
    2014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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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선>> 이병한, 이영주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중국 당나라 시인들의 선집이다. 보름 동안 읽은 책이라곤 이 한 권이 전부다. 언제나 그렇지만, 갑자기 당의 시를 읽은 이유는 없다. 어떤 계기가 있었지만, 꼭 짚어서 말할 수 없다. 잡다하게 책을 읽지만, 갈수록 헤매고 있다. 근래에 우연히 서점에 들러서 김혜순이라는 시인의 <날개 환상통>이라는 시집을 사기는 했다. 아주 오랜만에 구입한 시집이었다. 요 몇 년 사이에 시집이라곤 단 한 권도 사지 않았고, 읽지 않았다. 처음부터 시에 냉담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즉 시인이 넘쳐나고, 시집의 공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때와 약간은 관계가 있어도 보인다. 정확하지는 않다. 늘 무슨 결정을 하든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책을 읽을 것인가가 생계나 이해관계에 맞물리는 일도 아니다 보니 그런 선택이 뚜렷한 계기가 있을 리 없다. 내 취향은 多보다는 小에 있는 듯도 하다. <날개 환상통>을 읽어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더라. 수다스럽다 정도였다. 말들의 잔치에 난 불청객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오래 전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현대를 배우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는 격려가 가을바람처럼 부질없이 느껴진다., 나는 이제 그럴 힘도 의욕도 없구나. 그리고 세상의 공전과 자전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미친 속력이다. 새 엔진을 장착하고, 연료를 주입하여 남들이 쫓아가는 만큼 따라가기를 포기한다. 신발장에서 오래 된 운동화를 꺼내 다시 끈을 조이거나, 낡은 자전거를 손질하여 동네 뒷길을 어슬렁거릴 생각이다. 모두가 나를 앞서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뒤에 남는 길은 온통 내 차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야 할 방향이 없으니, 그곳에서 동서남북, 앞뒤로 왔다갔다하며 놀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특히 마음에 드는 편집은 왼쪽에 원문이 실리고, 오른쪽에 번역문이 실린 점이다. 해설이나 설명이 없이 시 그 자체만을 즐길 수 있어서다. 가끔 운전을 할 때라디오를 듣는다. 한 채널만 맞추어져 있다. kbs클래식 FM이다. 이유는 딱 한가지다. 진행자나 아나운서들의 개입이 가장 적고, 오직 음악만 틀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수다나, 사연들이나 충고나 해설 등이 온통 소음이나 광고처럼 정신을 산란하게 한다. 셀 수 없고, 해아릴 수 없는 사연들, 이유들, 충고들, 주장들 , 해설들. 등등등.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그냥 음악만을 듣고 싶다. 나는 오늘 얼마만큼 말들을 쏟아내었는가? 말이 되는 말, 말이 안되는 말들의 소음을. 이 조용한 밤이 새벽이 없다면 삶을 견디기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한 줄기 석양 빛이 물속에 퍼지니, 강의 절반은 파르스름하고 절반은 붉구나, 9월 초사흘 밤은 정말 아름다우니, 이슬은 진주 같고 달은 활 같다.(백거이 작 저녁 강)/ 이런 정감이나 정취를 현대 세계는 그려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대란 수다스럽다.

    어느 책에서 ‘사물의 정형화’라는 말을 들었다. 정형화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일정한 형식이나 틀로 고정하다라는 의미다. 사물은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한다. 정형화를 형상화로 바꿔도 될 듯 하다. 형상화란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추상적인 본질 따위가 어떠한 방법이나 매체를 통해 구체적이고 뚜렷한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이란 바로 사물의 정형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방면으로도 이 말을 적용해 볼 수도 있겠다 싶다. 마음의 정형화, 사유의 정형화, 감정의 정형화 등등. 화가란 사물을 그림으로 정형화하고, 음악가란 사물을 음악으로, 시인이란 사물을 언어로 정형화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형화’ 혹은 ‘형상화’가 없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이나, 감정 등의 사물을 형상화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벙어리나, 장님, 귀머거리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어린애처럼 우는 일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언어라는 형식을 갖추지 못한 어린애는 울부짖는 동물일 뿐이다. 시란 언어라는 도구로 지어진 작품이다. 골동품에 취미가 있는 인사는 골동품을 이리저리 보면서 행복감을 느낄 것이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소리의 형상을 통해 즐거움을 누린다. 내가 골동품에 취미가 있지는 않지만, 唐詩를 읽는 내내 그런 즐거움이 있었다. 어차피 물건도, 소리도, 음악도, 그림도 언어도 감정도 사물의 일종이며, 예술 작품이란 이런 사물을 정형화하는 행위이다. 물건은 내가 만질 수 있지만, 음악이나 시는 만질 수 없는 소리나 사유의 영역이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唐詩를 읽는 내내 골동품 같은 물건처럼 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언어도 또한 하나의 사물이며, 시란 사물(인간의 정서나 사유 등)을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정형화한 작품이 아닐까. 어쩌면 살아가는 일을 삶이라고 한다면 삶은 살아가는 일의 정형화이다. 모든 말과 언어가 시가 아닌 것처럼 또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 아닌 것처럼 언어나 사유나 소리를 어떻게 ‘정형화’하느냐에 따라 소음이 될지 아름다운 예술이 될지 판가름나는 것이 아닐까? 내게 唐詩를 읽는 즐거움은 사유나 감정의 아름다운 정형화를 체험하는 경험이었다. 내 삶이 소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시에서 그런 정형화를 배워볼 수도 있지 않을까?

  • 중국 시가론의 전개
    저자
    류성준 지음
    출판사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발행연도
    2004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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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랑시화>> 곽소우 교석. 김해명,이우정 옮김. 소명출판



    가을이 지나면 밤이 길어진다고 한다. 한 책을 읽고 나면 다음번에는 무슨 책을 읽어볼까 하는 근심이 있다. 나의 근심은 이렇듯 하찮다. 우치다 다쓰루의 <용기론>을 읽다, 이 책이 잠깐 언급되어서 읽게 되었다. <창랑시화>란 책의 제목도 몰랐는데, 대출한 이유는 지금으로서도 알 수가 없다. 시장을 걷다가 아무 물건이나 산 것과 다름없다. 단지 읽을거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읽기 싫으면 덮었다. 조금 재미있으면 읽다가, 재미 없으면 건너뛰거나 읽지 않았다. 엄우(1197?-1253?)는 남송 문화비평가로 호가 창랑포객이라고 한다. 그래서 책 재목이 <창랑시화>인 모양이다. 즉 창랑선생의 시론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 시화를 1959년 5월 곽소우라는 학자가 교석하였다. 곽소우는 서문에서 <창랑시화>는 禪으로 詩를 비유하였으며, 시의 형식과 예술성에 치중해 시를 논한 저서라고 한다. 후대 시론과 몇몇 특정 시인들의 창작에 상당한 영향을 일으키고, 비교적 많은 비난과 공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시와 시론에서 어느 정도 파문을 일으킨 가치 있는 비평서였는 모양이다. 곽소우는 교석을 통해 창랑시화를 두루 살펴보고 있다. 요즘은 문학에 비평은 드물고, 해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때 ‘주례사 비평’이니 하면 그런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였다는데 이제는 그런 시도도 많이 줄어들었는지, 비평이 주의를 끄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비평은 없고 해설만이 어지럽다. 모두들 점잖아진 모양인데, 독자로서는 많이 아쉬운 지점이다.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도 하였는데, 그런 싸움이 없다. 한국문학사에서는 몇 번의 그런 큰 싸움이 있었다고 하는데, 큰 논쟁 중 하나는 ‘참여’냐 ‘순수’냐 하는 논쟁이었다고 한다. 논쟁과 토론은 유적이 되어 역사책에 박제되고, 지금은 해설과 칭찬과 공감의 시대가 되었다. 평화를 사랑해서 그런지, 다들 지치고 피곤해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읽다보면 엄우를 옹호하는 자들과 비판하는 자들이 신랄하게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도 하며 오랫동안 이 책은 논쟁의 한 가운데 위치한 듯하다. 이 점은 내가 시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볼만하고 흥미롭다. <창랑시화>는 시편, 시체, 시법, 시평, 고증 다섯 편으로 집필되었다. 부록이 실려있다. 곽소우는 엄우의 원문을 먼저 싣고, 뒤에 이에 대한 해제를 다는 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창랑시화>의 주석이라고 해야할 듯 하다. 당이나 송의 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오언절구나 칠언 뭐니 하는 것도 아는 바가 없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길을 가다 보면 늘 익숙한 길만을 찾아다닐 수는 없다. 때로는 낯선 곳에서 헤매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하며 허비를 하기도 한다. 아무 생각도 없이 걷다가 이상하고 낯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정해진 목적지도 없기에 손익을 따질 것도 없다. 엄우는 부록에서 그의 시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오랜 동안의 공안을 끊는 것으로 참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담론이며, 지극히 온당하며 하나로 귀결되는 논의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창작과 감상을 통해 실제로 검증하고 터득한 것이며, ----옆 사람의 울타리에 기대거나, 남의 견해를 답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백과 두보가 다시 태어난다 하여도, 재 말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是自家實證實悟者 (나 스스로 검증하고 터득하다) 옆 사람의 울타리에 기대거나, 남의 견해를 답습하지 않았다. 용기를 내자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저자
    우치다 다쓰루 지음 ; 김경원 옮김
    출판사
    원더박스
    발행연도
    2018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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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론(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도서관에 책 신청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딱 두 번 했지만, 앞으로는 신청를 할 생각은 없다. 책을 구매할 정도의 벌이가 된다. 하지만 다른 이유를 두 개 든다면 하나는 책의 종류가 많고 다양하여 신청의 즐거움이 없어서다. 셀수도 없는 의견에 또 하나의 의견을 보태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도서관의 선택을 따를 생각이다.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도서관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용자의 여론이나 유행이나 개인적 취향에 휘둘리지 말고 ‘어떤 도서관’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저 술집이 그렇고, 저 술집은 이렇고 하는 것 처럼 도서관마다 특색이 있었으면 좋겠다. 소비자가 왕인 세상에서 욕먹을 주장이긴 하다. 어느 날 문득 인생을 예술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생활과 생존의 공간에서는 거짓말도 하고 위선도 부리고, 몹쓸 짓도 해야 하고, 남들에게 모질게 말도하고, 대세에 맞게 변신도 하고, 싫은 표정도 지어야 한다. 생활의 공간이 일상이라면 예술의 장소는 무대가 아닐까. 무대가 꼭 물질적일 필요는 없다. 무대에서 열연을 하는 연주자를 보고 있노라면 생활의 공간에서 해야 하는 모든 말들과 행위들은 말끔이 사라지고, 오직 연주에만 몰두하는 그네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거기에는 거짓말도 위선도 가식도 없고, 오직 한 가지가 있다면 최선의 연주와 연기만이 있는 듯하다. 삶이 생존의 장이 아니라, 무대로 여기고 아름다운 배우로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떤 연기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치다 다쓰루의 <용기론>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용기를 논할 게 아니라, 돈을 더 벌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생활에 충분한 돈이 생기면 용기는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 부분적인 진실임에는 틀림없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현대판 버전이다. 하지만 책을 가끔씩 읽고, 공동체의 평화적 공존을 생각하고, 인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이라도 있다면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야만 한다. 돈이 있든 없든, 출세를 했든 아니든 누구나 인생을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음을 부인한 꼴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화폐가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서 현실성이 없음을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가느다란 가능성을 타진해 보아야 한다. 이 세계의 화폐를 향한 미친 속도를 제어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멈춤’을 들어 볼 수는 있을 듯 하다. 나는 이미 책을 읽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책에 더 관심을 둔 내 습관이 늘 후회되기도 한다. 한 번 읽었을 때는 우치다 다쓰루라는 철학자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두 번을 읽고나서야 그의 진가를 조금 알 수 있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천천히, 자주, 주의 깊게 보아야만 알 수가 있는 모양이다.

    출판사 편집인이 편지를 보내 묻고 우치다 선생이 답신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우치다는 “지금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받고 “용기가 아닐까요”라는 대답에서 시작한다. 우치다는 용기를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라고 한다. <맹자>의 한 구절에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바르다고 할 수 있다면 천만 적이 막아서더라도 뚫고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는데, 선생은 용기의 전형이라 한다. 용기의 발현이나 내용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용기란, 바로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라고 하였다. 역사상 고립을 이렇게 두려워한 시대가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한다. 왜, 고립을 이렇게까지 두려워할까?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도 세상의 흐름에 같이 하지 않으면 뒤처지고 생존의 위협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고, 실제 현실에서도 그런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나는 고립될지언정 내 삶을 살겠다가 의지를 용기라고 하는 듯하다. ‘연대를 구하고 고립을 두려워하지 마라’. 책은 우정, 노력, 승리를 용기, 정직, 친절과 대비시키고 있다. 용기는 정직과 친절과 한 세트 메뉴라고 한다. 우정, 노력, 승리는 고도성장기에 일본의 어느 잡지에서 일본 청소년들에게 요구하였던 덕목이라 한다. /우정을 풍요롭게 누리는 사람은 주변인들에게 이해와 공감, 그리고 지원을 받습니다. 전혀 고립돼 있지 않죠. 그런데 용기는 주변의 이해, 공감, 지원이 없는 곳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질입니다. 모든 게 우정에서 시작되는 세상에서는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미의 전복과 논리적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이해와 공감, 지원이라는 자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에 따른 전리품이 바로 승리 혹은 성공이다. 우정, 노력, 승리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지금의 시대가 매일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강요하고 있는 덕목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듯 하다. 우정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성공하기 위해 우리는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사람들은 유명해지고 싶어할까. 성공에 대해 강박증상을 보일까. 유명해지고, 성공을 하지 않으면 삶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용기, 즉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용기는 정직과 친절과 묶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직이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말을 더듬고, 머뭇거리고, 바꿔 말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때로 입을 다무는 것/이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생성과정이라 한다. 그래서 정직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도덕적 확고함이니 신념이 아니라, ‘아등바등’을 지속시키는 힘이라고 한다. 이런 ‘아등바등’은 사람을 지성적, 감정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연료하고 한다. 바꿔 말하면 정직하기 위해서는 지성적, 감정적 성숙이 필요하고, 성숙이 필요한 이유는 미숙한 사람은 집단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직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성숙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을 떠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는 듯하다. 우치다 선생에게 친절이란, /다른 사람이 발신하는 구난 신호를 듣는 것/. /도와 달라는 목소리가 되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의 측은지심을 설명한다. 그에게 친절이란 실천이다. 이해관계를 따지고, 가능성을 재고, 선택하고 판단하여 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없이 움직이는 측은지심이다.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생각 없이 움직이는 행위다. 친절은 무도와 상통하고, 저자가 생각하기에 무도적 이상이란,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이고, 수련은 생각 없이 움직이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자리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무도다/. 이런 능력은 민감한 감수성에서 가능하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란, 사실 불쾌함, 무의미함, 부조리함을 견디며 느끼는 압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압박을 덜 느끼기 위해 감수성을 둔감하게 하려고 한다. 선생은 /감수성을 둔하게 하는 삶은 자멸적인 삶/이라고 한다. 친절이 없는 삶이기도 하고, 그런 삶은 삶과 자신을 망치는 일이라고 하는 듯하다.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이 책은 단순하게 요약할 수 없는 더 많은 풍요를 담고 있다. 요점이 아니리, 실은 읽는 행위가 중요하다. 삶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고, 독서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읽어봐야 안다. 용기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고립을 견디는 힘이 있어야 하며, 정직, 즉 지적이고 감정적인 성숙이 같이 해야 하고, 감수성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흔히 한 번 뿐인 인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 (오일러가 들려주는) 최적화 이론1 이야기
    저자
    오혜정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10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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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일러가 들려주는 최적화 이론 1 이야기>> 오혜정 지음. 자음과 모음.

    내가 쓰는 독서록은 매우 허접하다. 그래도 뭔가를 써내려면 적어도 두 번 정도는 읽어야 한다. 이번 책은 딱 한 번만 읽었고, 대충 훑어만 보았다. 몇 가지 단어 말고는 남은 것이 없다.
    나의 책읽기는 언제나 실패한다. 한 번 더 실패를 한다고 실망할 일도 없다. 어차피 나의 선택과 판단은 무수한 오류 위에 지어졌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도 실수의 반복이다. 그렇게 삶은, 책읽기는 반복된다. 어제 일을 오늘도 반복할 수 있고, 책읽기를 계속할 수 있다면 우선은 다행한 일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무너지면 또 지으면 되는 식이다. 영원한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는 반복된 행위가 어쩌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아닐까. 그래프, 최적화 이론, 오일러 회로, 해밀턴 회로, 수형도. 생성수형도, 행렬, 색칠하기 등 이런 단어만이 남았다.. 수학은 내가 어려워하는 분야인데다, 이런 식으로 읽어서는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이 책 뿐 아니라, 나의 독서는 언제나 시간을 낭비한다. 낭비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헛되이 헤프게 쓰다라고 나온다.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알차게 써야 하는데 걱정이다. 그렇지만 나는 늘 시간을 낭비한다. 아무 목적이 없이 산책하기,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공원 의자에 앉아 있기, 그냥 잠 많이 자기 등으로 시간을 낭비한다. 시간을 자원이나 재물로 생각하거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분명 낭비가 맞다. 하지만 시간은 원래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나에게는 생계를 해결 할 직업이 따로 있고, 돈을 벌기 위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낭비를 한다. 독서를 하는 뚜렷한 목적도 없다. 굳이 한 가지를 든다면 소화불량이다. 늘 체한 느낌이라 소화를 돕기 위해 읽는다. 책을 읽는 이유는 이 무료한 시간을 떼우기 위한 고육책이다. 어떤 책에서 양자물리학에서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난다. 학자나 저널리즘에 종사하지 않기에 엄밀한 출처는 달지 않는다. 가정이고, 추론일 뿐이고, 그 외 시간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시간을 ‘사건’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 기존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시간’이었다면, 여기서 시간은 우연한 만남 정도로 이해하는 듯 하다. 즉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흐르지도 않고, 하루 24시간 정량도 아니다. 이런 비유는 어떨가? 우주 공간을 무작위로 유영하는 두 물체가 우연히 충돌하는 사건이 시간이다. 시간을 물질로 설명하고 있다. 과거로도 미래로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아니 과거나 미래, 현재라는 개념도 없다고 하는 듯했다. 만약 이런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시간을 낭비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시간은 통장에 저금된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조건은 절대적 시간과 공간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나 경계이자 생존 환경이라지만, 우리는 다른 시간 관념을 상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가. 만약 시간을 ‘사건’이라 본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죽음은 단지 우연한 사건뿐일지도 모른다. 목적도 동기도 없이 걷는다. 읽는다. 나의 산책과 독서는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다. 조급해하지 말자.

    수학의 가치는 복잡한 계산에 있지 않고, 원리의 이해와 논리적 사고에 있다고 한다. 최적화 이론은 복잡한 문제들을 단순한 수학적 모델 중 하나인 그래프로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래프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점이 크거나 작거나, 선이 굵거나 가늘거나 길거나 짧은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점과 점 사이가 멀거나 가깝거나도 관계가 없다. 그래프로 표현된 대표적인 예는 지하철 노선도이다. 지하철 이용객들을 위한 최적화된 안내를 제공한다. 복잡한 지하철 노선을 단순하게 점과 선으로만 표시하였다. 수학은 조금 폭력적인 요소가 있다. 이런 단순화는 많은 것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수학적 모형이 없다면 도시 계획도 복지 시스템도 항공기 운항도 많은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가령 백 명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백 명은 성격도, 취향도, 키도, 몸무게도, 개성도 각양각색이다. 그들 모두가 자신이 단지 한 명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울려 사는 관계는 사연도 많고 의미도 복잡하다. 그런데 그래프는 단지 아무 특징도 없는 익명의 점과 선으로 표시할 뿐이다. 패턴이라고도 구조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작업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런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원리의 이해와 논리적 사고다. 원리나 논리는 언제나 차갑다. 수학에 문외한이지만, 내가 수학책을 읽은 이유다. 세상의 모든 위대함은 열정보다는 이런 차가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하는 지도자가 열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병사들을 죽게 하고 한 사회나 국가를 망친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다 들어주고 맞춤 처방을 내리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런 역할은 판소리나 문학이나 예술이 감당할 몫이다. 수학책을 읽으면 패턴이나 구조, 즉 원리를 이해하고 논리적 사고가 배양된다. 한국 사회는 너무나 열정적인 사회다. 난 이런 열에 들뜬 사회에 찬물을 끼얹고 싶다. 아직은 재미를 알지 못하지만, 수학책을 꾸준히 읽은 이유다. 단지 점과 선으로 세상의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니 대단한 매력이 아닌가. 그러나 이 단순함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조선백자의 단순한 흰색에 온 우주가 들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수학이란 저 단순한 원색에서 원리를 이해하고 논리를 사고할 수 있고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오일러 회로란주어진 그래프에서 꼭짓점은 여러 번 지날 수 있지만 모든 변을 오직 한 번만 지나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회로. 해밀턴 회로란, 주어진 그래프에서 꼭짓점을 오직 한 번씩만 지나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회로. 수형도란, 회로를 갖지 않으면서 연결된 그래프. 생성수형도란, 연결된 그래프의 모든 꼭짓점을 포함하면서 변의 일부만을 삭제하여 만든 수형도. 그래프를 수치화하여 행렬로 나타낼 수도 있다. 점과 선으로만 구성된 이 단순한 그래프가 변화를 거듭하며 자유롭게 변신을 한다. 자유가 소비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변신할 수 있는 힘이라면, 삶의 충만함은 변화할 수 있는 힘에 있다면, 그 바탕에는 원리의 이해와 논리적 사고에 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수학책을 읽는 이유다.

  • 작은 땅의 야수들 : 김주혜 장편소설
    저자
    김주혜 지음 ; 박소현 옮김
    출판사
    다산책방
    발행연도
    2022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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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장편소설 박소현 옮김. 다산 책방.
    읽기만 해서는 재미가 덜하다. 그러나 읽기만 한다면 훨씬 수월하다. 흔히 읽기와 쓰기를 한 묶음처럼 여기지만, 읽기와 쓰기는 전혀 다른 분야가 아닐까 싶다. 먼저 문자가 있었고, 그 뒤 읽기가 있었겠지만, 문자가 반드시 쓰기와 연결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 때 문자란 쓰기보다는 기호나 상징의 의미가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판소리 사설도 처음에는 입으로 구전되다가, 18세기를 전후하여 쓰여졌다고도 하지 않는가. 굳이 따져 본다면 읽기(구전, 낭송, 암기)등이 먼저고 쓰기가 나중에 생긴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점은 읽기와 쓰기는 다른 작용이 아닐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잘도 읽는 내가 쓰기 일에 이렇게 애를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읽는 자 따로 있고 쓰는 자 따로 있어도 될 듯 하지만, 또한 잘 읽기 위해서는 쓰기가 필요하고, 쓰기 위해서는 잘 읽을 필요도 있는 듯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세상 이 꼴 저 꼴 경험하기도 하고 얻어들은 것도 많아진다. 세상은 사람들의 삶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가끔 소설이 시시해질 때도 많다. 어느 정도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이들은 이런 말들을 하기도 한다. 내 삶을 글로 쓰면 대하소설로도 모자랄 것이다 같은 말들. 굳이 삶의 굴곡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생애란 파란만장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소설에서 어떤 삶을 하나 더 보탠들 무슨 감명을 더 하겠는가. 그럼 소설은 언어의 예술에 가치를 두어야 할까. 쓰기의 예술일까.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지만, 이것만이 다라면 시나, 희곡, 드라마 대본에 못미칠 수도 있다. 소설은 삶에 교훈을 주기 위해 필요할까. 수많은 도덕이나 윤리서가 있지 않는가.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일까? 단지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이라면 영화나 인터넷에 설 자리가 없지 않을까. 어떤 사상이나 사유에 있을까. 사회 고발에 있을까. 이런 모든 것에 골고루 관계하는 걸까.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가 소설의 좋은 독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알 듯 하다. 읽기 보다 분석에 더 익숙한 사고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삶은 사는 것이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질문은 끝이 없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럼 살면 되지 소설 같은 것은 왜 읽고 쓰는걸까. 하여간 우리의 문명이나 문화는 읽고 쓰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하다는 추론밖에 할 수 없다. 또한 문자란 인구의 집중과 인구의 증가, 도시가 형성되고 우리들의 삶이 사회라는 테두리를 가진 이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더 크고 보편적인 사회란 문자와 같은 비상한 문명의 도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근대소설과 그 이전의 소설의 차이를 이야기와 묘사의 차이라고 했다.(누구 어떤 맥락에서 이런 주장을 하였는지 긴 논증이나 인용이 필요하지만 난 전문 비평가도 분석가도 아니기에 생략한다. 알 수도 없다. 그냥 귀동냥이다) . 또 어떤 이는 현대 소설의 주요 테마는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라고도 하며, 이런 경향이 심화되면 개인의 심리 묘사가 소설의 주류가 되어 간다고 하였다. 즉 개체로서의 개인을 다루다 보면 개인의 심리의 분석이나 묘사에 이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에 반해 “전체로서의 인간” 즉 집단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에서 밀려난다고 하였다. 나는 이 두 가지 틀로서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어보고 싶다. 이야기와 묘사는 어떻게 다른가. 이야기는 들려주는 것이고 묘사는 보여주기다. 이야기는 들려주기에 듣는 자, 즉 청자가 필요하고 묘사는 보는 자, 즉 독자가 필요하다.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들려줄 수 있다면, 묘사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여 줄 수가 없다. 이 책은 마치 어릴 적 할머니가 손자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알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진 아이다 된 기분이었다. 매일 보이는 좁은 세계가 내게 무슨 큰 흥미와 재미와 감동을 주겠는가? 나는 집구석을 매일의 일상을 탈출하여 저 평원으로 더 큰 세계로 나아간 듯 하였다.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인간’ 으로서 삶을 느꼈다. 세계는 독립된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유동하고 얽키고 설킨 인간과 모든 것들의 복잡한 세계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개인의 도덕적 모험’의 문법을 가장 잘 구현하는 매체는 할리우드 영화에서가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 수십 만 명의 인간이 죽어나가는데, 주인공이 특별한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한 영웅적인 모험을 그리는 영화들이다. 그리하여 한 영웅은 사랑하는 한 사람을 구하고, 영웅이 된다는 스토리다. 그에 비해 ‘전체로서의 인간’이란 낙동강의 한 물방울이 되어 그 강과 더불어 바다로 가는 긴 여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바위에 부딪치고, 증발 되고, 어떤 웅덩이에 갇혀 썩어가고, 때로는 순풍을 만나 유유히 흐르고, 홍수가 나서 어느 산골에 쳐박혀 말라버리기도 하는 전체로서의 삶. 웅장하고 슬프고, 장엄한 삶. 그래서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나는 모처럼 큰 잔칫상을 받은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들었다. 소설이 이성적 인식의 기쁨 보다는 정서적 감동에 관여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보편적인 정서가 있어야 한다. ‘개인의 도덕적 모험’에 초점을 맞춘 소설은 보편적 정서를 배제하고 개인의 심리에 집중하고 개체성을 더 드러낼수록. 보이는 것의 묘사에만 치중한다면 앞으로도 나의 소설 읽기는 더 어려워 질 듯 하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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