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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이 들려주는 경우의 수 이야기>> 정연숙 지음. 자음과 모음. 2-1
//진정한 수학자는 모든 사물을 정의와 원칙에서만 설명한다. 바르게 사고한다는 것은 명료한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명료한 원칙이 참 어렵다. 수학자라는 직이 어려워 보인다. 어김없이 오산도서관에서 문자가 도착하였다. 내일(22일)이 반납일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에 반납일 이전에 반납을 하지 않은 듯하다. 다행히 이런 책들은 인기가 없어서 독촉은 받지 않는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또 해야한다. 평소에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겠다. 말이 많아지면 쓸 말이 궁해진다. 후회도 많아진다. 블레즈 파스칼은 16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39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수학 과학 철학 종교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날 파스칼의 친구가 물었다고 한다. 문제는 //실력이 똑같은 두 사람이 주사위 게임을 하는 도중에 사정이 생겨서 게임을 중단하게 되었다네. 이 경우에 상금을 어떻게 분배하는가?// 파스칼은 당시 유명한 수학자인 페르마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명쾌하게 해결하였다고 한다. 이걸 계기로 확률가능성이라는 수학의 한 분야가 탄생했고 그 후 확률론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해결 방법으로 무효로 하거나, 반으로 분배하면 될 듯도 하지만, 수학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수학은 집요한 데가 있긴 있다. 하긴 이런 집요함이 없었다면 수학이 성립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수학자가 이런 문제로 긴 편지를 주고받은 것과 화가 고흐의 편지는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늘 그렇지만 시작하기 전에 개념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것이 정리가 안되면 내내 혼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시행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실행하는 것. 과학에서 실험과 같아 보인다. 사건이란? 시행을 통해 나올 수 잇는 결과물을 사건이라 한다. 경우의 수란, 사건이 일어날 경우의 가짓수이다.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가 시행이다. 이때 사건은 <1, 2, 3, 4, 5, 6>이다. 이 중 하나의 결과물이 나온다. 일어날 사건은 모두 6가지가 있고, 이때 ‘경우의 수는 6’이다. 주사위 한 개를 던져 2보다 작은 수가 나올 사건은 한 가지 1뿐이다. 이때 경우의 수는 1이다. 수학에 완전히 무지하지만, 이런 초보적인 내용을 재차 써보는 이유가 있다. 수학을 읽다보니 이런 기초적인 개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좌표를 잃어 버릴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하고 있나, 혹은 내가 어딜 가는걸까, 혹은 내가 왜 사는걸까. 할 수도 있다. 비록 더딜지라도 천천히 가야 한다. 사건 A 또는 B가 일어난 경우의 수는 a+b 합의 법칙이다. 주사위 놀이에서 사건A: 두 눈의 합이 5인 경우 (1, 4), (2,3), (3,2),(4,1) -4가지. 사건 B : 두 눈의 합이 3인 경우 (1,2), (2,1)- 2가지. 두 눈의 합이 5 또는 3이 되는 경우의 수는 4+2=6가지다. 사건 A, B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의 수는 a*b 곱의 법칙이다. ‘ㄱ’ ‘ㄴ ’ 2개의 자음과 ‘ㅏ’, ‘ㅓ’ 두 개의 모음에서 한 개의 자음과 한 개의 모음을 선택하여 만들 수 있는 글자의 수. 자음 2가지, 모음 2가지. 경우의 수는 2*2=4. 경우의 수는 4다. <가,거,나,너>의 4이다. 합의 법칙이 적용되는 경우는 ‘일어나는 경우의 수’이면, 곱의 법칙이 적용되는 경우는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의 수’이다.
이런 식으로 뭔가를 쓰기는 내키지 않지만, 수학은 반복해서 익혀야 하는 과목이라 초보인 나는 이렇게 쓰면서 복습을 해나가는 수밖에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다음으론 순서가 있는 경우의 수다. 앞에서는 단 순 경우의 수였다면 지금부터는 순서라는 항을 하나 더 추가한다. 네 명의 아이들이 그네 하나를 순서를 정해 타는 경우의 수는 1+1+1+1=4*1=4. 이때 경우의 수는 4다. 네 명의 아이들(가,나,다,라)이 그네 A. 그네 B 두 개를 두 명씩 짝을 지어 타는 경우의 수는? 3+3+3+3=4*3=12다. 가가 그네 A에 타면 그네B에는 나,다,라 가 탈 수 있다. 한 아이당 3가지 경우가 생긴다. 아이들이 4명이니 경우의 수는 12다. 네 명의 아이들이 4개의 의자에 순서대로 앉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번 의자는 네 명에게 모두 기회가 있으니 4가지 경우가 있고, 2번 의자에는 1번 의자에 앉은 아이 한 명을 제외하면 3가지 경우, 3번 의자는 두 가지 경우, 4번 의자는 한 명만 남았으니 1가지 경우다. 그런데 순서대로 모두 앉을수 있는 경우의 수는 4*3*2*1=24. 그런데 왜 4*3*2*1인가? 슬슬 부아가 인다. 비슷한 문제 열 가지를 내서 종이를 얼마든지 소모하더라도 모든 경우를 다 적어보고 패턴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위대한 선배들이 있어 벌써 원리들을 세워 놓았다. 고마운 선배들. 우선 ‘순서가 있다’ 라는 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과 2가 있을 때 순서가 없다면 1과 2는 모두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순서가 있다면 첫 번째 순서의 숫자와 두 번째 숫자의 의미는 달라진다. 같은 1이라도 첫 번째는 십의 자리고 두 번째는 1의 자리다. 순서가 없다면 1‘2 나 2’1은 같지만 순서가 있다면 12가 되고 21이 되니 다른 수가 된다. //순서가 있다는 것은 뽑은 것들을 일렬로 줄을 세우는 경우와 같다// 네 명의 아이들을 1,2,3,4 라고 기호로 나타내고 순서가 있다면 천의 자리, 백의 자라, 십의 자리, 일의 자리로 순서를 나타낼 수 있다. 천의 자리는 1,2,3,4 4가지 다 올수 있다. 백의 자리는 천의 자리에 한 개의 수가 정해졌으니 3가지, 십의 자리는 마찬가지로 2가지, 일의 자리는 하나 남은 한 가지가 된다. 동시에 일어나니 곱의 법칙을 이용하여 4*3*2*1=12가 된다. 순서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경우의 수 구하는 방식은 다르다. 믿을 수 없으면 직접 재현해 보면 된다. 얼마만큼 시간이 걸리든. 그런데 우리 선배들이 그런 노력들을 다 해 놓았다. 오늘 무슨 억지를 써서라도 오늘 끝마치려고 했으나, 부득이 하게 내일로 연기해야겠다. 용량 초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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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뇌터가 들려주는 이항연산 이야기>> 김승태 지음. 자음과 모음.
수학 시험을 치러야 하는 처지가 아님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냥 건너뛰면 된다. 하지만 시험을 보아야 한다면 좋은 점수를 위해서 무조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수학은 걸음마 수준이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개념 정도만 숙지하는 수준이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영어 사전을 보는 방식을 연습하는 수준이다. 대부분 책들처럼 이 책들도 뒤로 가면 더 어려워진다. 노력은 해보지만 대부분 두어 번 읽고 다음을 기약한다. 수학은 약속이고, 패턴이고 관계인 듯 하다. 어려운 문제는 여러 관계가 얽혀 있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한 가지 공식이나 관점이 아니라 여러 도구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나는 준비된 수학적 도구가 빈약하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시험이 없으니 느슨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재미가 있을 때도 있고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릴 때도 있다. 그래도 계속해 볼 작정이다. 수학 책은 매일 조금씩 읽기보다 집중해서 읽어야 할 듯 하다. 평상시에는 다른 것을 읽고 수학은 휴일을 이용하여 집중해야겠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최근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두 건축가의 건축 에세이를 두 권 구입하였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은 생각에 따분한 수학이 더 따분해졌다. 건축은 현실에 밀접하고 구체적인데 반해 수학은 추상적이고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항연산은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이라고 한다. 이항연산에 큰 기여를 한 수학자가 에미 뇌터라고 한다. 그는 1927년에 <대수체 및 대수함수체에 있어 이데알론의 추상적 건설>를 발표하여 추상대수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큰 공헌을 하였다는 수학자에 대한 존경과 기억을 위해 적어 본다. 당시에 독일에서는 여성은 대학 입학 자체가 불가능했고, 더구나 교수가 되기는 더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교수가 되어서도 무보수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 책의 첫 장은 수의 체계부터 시작한다. 수는 크기 순서로 자연수, 정수, 유리수, 순환소수, 무리수, 실수의 체계를 이룬다. 실수가 가장 큰 수의 체계이다. 이 체계가 단지 수의 크기나 범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체계라는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산(계산)과 체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사칙 연산은 +, -, *, 로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덧셈, 곱셈에 대한 실수의 연산법칙은 실수 A,B,C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 교환법칙-자리를 바꾸어도 식이 성립함. 결합법칙- 괄호로 묶어서 계산하기. 분배법칙-곱셈으로 괄호를 없애 줌. 수를 교환하고 분배하고 결합하여 일종의 마술을 부린다고 생각해 보자. 비단 이런 법칙들은 수학만이 아니라 통계나 데이터 처리 혹은 사회 이론이나 철학에도 유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인간들간의 관계도 이런 관계를 적용하지 말란 법은 없어 보인다. 수학에는 ‘닫혀 있다’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공집합이 아닌 집합 S의 임의의 두 원소에 대한 연산의 결과가 다시 S의 원소가 될 때, 집합 S는 그 연산에 대해 닫혀 있다고 한다- 즉 자연수 두 수를 연산하였을 때 결과가 자연수가 나오면 그 연산은 자연수에 닫혀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A,B가 자연수(N) 일 때 기호로는 A∈N, B∈N이면 A+B∈N으로 나타내고, 이것이 성립하면 닫혀있다고 한다. 자연수는 덧셈과 곱셈에 대해서만 닫혀 있고, 정수는 나눗셈을 제외하고 닫혀 있다고 한다. 즉 자연수 2와 4이 있을 때 2-4=-2, 2÷4=0.5 –2와 0.5은 자연수가 아니기에 닫혀있지 않다고 한다. 즉 연산의 교환, 분배, 결합 법칙은 닫혀있지 않을 때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맞나?). 항등원은 영어로는 아이엔티티고 어떤 수와 연산한 결과가 자지 자신이 되게 하는 수. a+e=e+a=a를 만족시키는 e는 덧셈에 대한 항등원이다. a+0=0+a=a 덧셈의 항등원은 0. a*1=1*a=a 곱셈에 대한 항등원은 1.역원은 어떤 수와 연산하여 항등원이 되는 수. 항등원이 있어야 역원을 구할 수 있다. 자연수 덧셈의 항등원은 0이다. a+(-a)=(-a)+a=0 덧셈에서 항등원은 0인데, 임의의 수 a의 역원은 –a가 된다. 고로 자연수 덧셈에서 항등원이 0이니 0은 자연수가 아니므로 항등원은 없고, 역원은 –a가 되어 음수라 자연수가 아니기에 역원도 없다. 각 수의 체계마다 항등원과 역원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유리수(분수로 나타낼 수 있는 수)에서는 덧셈 곱셈 모두 항등원과 역원이 있다고 한다. ‘수의 쳬계’‘닫혀 있다’ ‘항등원’ ‘역원’ 등의 개념을 알아야 비로소 이항연산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대응- 두 집합의 원소를 맺어주는 일, 집합 x의 각 원소에 집합 y의 원소가 하나씩 대응할 때, x에서 y로의 함수라고 한다. 이항연산이란- 집합 S에 속하는 두수 a,b에 대하여 연산*에 따라 S에 속하는 하나의 수 c를 대응시키는 것, 즉 *(a,b)→c를 이항연산 또는 연산이라 한다. 즉 이항이 있는 연산이기도 하고 연산은 모두 이항 연산이라 할 수 있다는 의미인 듯(맞나?) 기호로는 a*b=c라고 한다. 연산은 닫혀있어야 성립한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우리가 수를 배을 때 자연수에서 시작하여 정수 유리수, 무리수, 실수로 점점 확장하는 이유는 세계를 확장한다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수 체계가 확장된다는 것은 세계가 넓어진다는 의미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수도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만 읽힌다. 예를 들면 1+2=3이 1에 2를 더하면 답이 3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연산 +(1,2)→3이라면 1+2는 3을 대응한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답과 대응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답은 닫혀 있는 느낌이고, 대응은 열려있다는 느낌이다. <<에미 뇌터가 들려주는 이항연산 이야기>>을 읽고 난 지금 이 정도 밖에 쓸 게 없다. ‘닫혀 있다’ ‘항등원’ ‘역원’ ‘대응’ 등의 몇 개의 단어를 들은 것으로 만족해야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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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서해문집
요 몇 년 사이 나는 운이 좋았다. 비교적 여유롭게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있었고, 책을 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의 노력은 사소했다. 슬픔은 개인적이라는 멋진 말을 들었다. 슬픔 등의 감정은 개별적 인간에 속한다. ‘민족이 슬피 울었다’ 같은 표현도 있지만, 사실 민족이나 국가 등은 감정을 느끼는 신체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슬픔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슬픔의 해소가 늘 개별적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가령 질병에 걸려 치료받지 못해 고통스럽다면 슬프다고 할만하다. 이런 슬픔은 의료보험 같은 공적 부조를 통해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개체로서든 사회적으로든 인간들은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계발하고 발견하고 여러 해결책들을 시행하여 왔다. 윤리라 해도 좋고 도덕이라 이름할 수도 있다. 종교나 제도를 통해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완전한 해결’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더 편리함과 안락함을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비용이 발생한다. 일테면 더 좋다고 알려진 청소기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천당’행 티켓을 구입해야 할 수고도 만만치 않아 보이더라. 나는 ‘행복’이 청구할 심리적 사회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지불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대신 약간 불행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요즘은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도 많고, 책을 읽는 시간도 늘었다. 계절의 변화와도 무관치 않다. 추울 때는 이불속에서만 있고 싶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행위가 전보다 좋아지기도 했다. 조금 더 즐거워졌다고 하고 싶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책을 읽는다. 이해관계에도 감정에도 얽히고 싶지 않다. 적게 먹고사니 특별히 이해관계에 얽힐 일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그 수가 적으니 감정에 얽힐 기회도 없다. 그러나 가능한 한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 ‘얽힘’을 난 감당할 수 없다. 대신 더 냉정한 인간이 되어가는 듯 하다. 어찌 따뜻한 사람이 못되고 점점 냉혈한이 되어가는지 개탄스럽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운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보다는 차가운 지폐 몇 장이 더 낫다. 참으로 개탄스럽다.
소비가 줄고, 경제가 불황에 빠졌다는 뉴스가 매일 보도된다. 체감으로도 그래 보이고, 통계도 사실로 보여준다고 한다. 세계정세도 영향을 미치고, 국내적으로는 현직 대통령의 ‘내란’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그 외 내가 알 수 없는 여러 원인이 있으리라. 내 경우만을 놓고 보더라도 가끔 술을 즐기는데, 가게를 이용하기보다는 집에서 혼술을 하는 경우가 늘기도 하였다. 내심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란’이 터지고(이건 한국전쟁 같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고, 모든 사람의 생활을 뒤흔들 수 있는 불행한 사건이다) 불안하고 엄청난 분노가 일었다. 사건이 종결되나 싶더니, 그 후 한국 사회 혹은 소위 ‘엘리트’라는 작자들이 보여준 행태에 매일 좌절하고 분노하고 치를 떨었다. 그 후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앉아 있어도 책의 글자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술과 안주에 더 많은 돈을 쓰기도 하였다. 혹자는 호들갑을 떤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란 즉 멀쩡한 나라에서 내부적으로 전쟁이 발발했는데 일상이 평화롭거나 어제와 같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란은 국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내란’을 종식시킬 권력과 자본이 없기에 몇 번의 집회 참가 외에 일상을 지켜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의 일상이란 낮에 돈을 벌고, 저녁에 책을 읽은 일이었다. 벌어야 먹고살 수 있으니까. 이렇듯 일상은 비루하다.
책꽂이를 살피던 중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기로 하였다.
<난중일기>는 이순신(1545-1598)이 진중에서 쓴 일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일기다. 정조 19년에 <이충무공전서>를 발행하면서 편찬자에 의해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매일 조금씩 일기를 읽었다. 임진왜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도, 이순신을 알기 위해서도 아니다. 굳이 까닭을 묻는다면 읽기 위해서 읽었다. 일기는 간략하고 건조하기까지 한다. 5월 4일 ‘비 오다.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다. 달이 뜰 무렵에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몹시 퍼부었다. 정사준이 와서 하루 내내 돌아가지 않았다. 이수원도 왔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실은 일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기는 초7일 비가 하루 내내 내렸다. 초 8일 비가 하루 내내 내렸다 정조방장이 들어왔다. 식이거나, 홍주의 격군으로 온 신평에 사는 사노비 엇복이 도망가다가 붙잡혔기에 목을 잘라 내다 걸었다. 하는 식이다. 사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드물고 설명이나 감상이 잘 묻어나지 않는다. 애통하다, 눈물만 흘렸다. 같이 간결하게 쓰고 있다. 그냥 사실을 적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읽으면서 사적인 일기가 아니라, 공문서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슬픔을 ‘슬펐다’라만 쓰고 있다. 도망간 노비의 목을 자르고서 그냥 ‘목을 잘라 걸었다’고만 한다. 그것이 전부다. 건조하게 읽히지만, 행간에서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가령 누군가 재해 현장을 보고 ‘이십 명 사망’ 다섯 자만 쓴다면 형편없는 기록일까? ‘이십 명 사망’그 다섯 글자에는 어떠한 수식이나 묘사보다 더 큰 슬픔과 애통함이 있고, 그보다 더 현장성을 살린 기록도 없을지도 모른다. 달리 더 무엇을 쓸 것이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전쟁 중 일기지만, 대부분은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전쟁 중이라고 매일 밤낮으로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여러 번의 교전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군량미를 조달하고, 훈련을 하고, 이런저런 공문을 처리하고, 술을 마시고,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병에 걸리고 치료하거나, 누군가는 죽고 다치고 하며 하루를 살아낸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런 따분한 하루가 없다면 전쟁도 없고 삶도 없다. 전쟁도 삶도 이런 하루에 깊이 매복해 있다. 감정이나 마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살아낸다. 2025년 아침 맑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다. 돌보는 길고양이 길순이가 옥상에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옥상문을 닫아 편히 쉬게 할 생각이다. 3일 만에 나타났다. 그동안의 노고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오늘은 같이 일하는 A씨가 휴가라 잠깐 출근할 예정이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후에는 포크 가수 김두수의 공연 관람이 예정되어 있다. 저녁밥을 먹고 오산천을 조금 걸을 예정이다. 가급적 뉴스를 보지 않으려 한다. 분통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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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가 들려주는 기본도형과 다각형 이야기>> 김남준 지음. 자음과모음.
<벤다이어그램 이야기>와 이 책을 같이 빌려서 읽었는데, 국가 중대사로 인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리즈물은 ‘초급 수학’이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집중을 해야한다. 그동안 읽을 수 없었던 이유는 나라가 이렇게 무법천지고, 헌법이 준수되지 않고 편법과 온간 불법들이 난무하는데, 수학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자괴감이었다. 이 나라의 소수의 엘리트란 작자들의 가공할만한 뻔뻔함과 무능함에 치가 떨린다. 이제 한 단계 고비가 넘어갔으니, 조금 편하게 일상의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한다. 읽은 지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일기를 쓴다는 심정으로 자판을 두드려 본다.
도형은 물체를 형태만으로 분류한 것이라고 한다. 도형에는 기본도형, 평면도형, 입체도형이 있다. 기본도형은 점. 선. 면을 말한다고 한다. 즉 도형을 이루는 3요소는 점, 선, 면이라고 한다. 평면도형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도형이고, 입체도형은 점, 선,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론>에서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선은 폭이 없는 길이다/. /면은 길이와 폭만을 갖는 것이다/.라고 약속하였다.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함이 아니니. 찬찬히 이 약속을 몇 번이고 되뇌어 본다. 그동안 수학자들은 점, 선, 면에 대해 많이 연구하여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새로운 약속을 만들었다고 한다. /점은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다/. /선은 점의 움직임으로, 길이만 있다/, /면은 선의 움직임으로, 길이와 폭이 있다/ <원론>의 약속을 조금 더 구체화 시켰다. 수학자 힐베르트는 점, 선, 면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말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를 ‘무정의 용어’라고 한다. 도대체 점, 선, 면이 무엇이 중요하기에 말들이 많은가 하겠지만, 수학은 이런 것들에 대한 약속의 학문이고, 이런 것들이 명확히 약속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체계라고 한다. 일테면 점을 백지에 찍어보면 크기가 있다. 선도 길이만 나타낸 것이 아니라, 위치와 넓이를 가지고 있다. 면도 마찬가지다. 사실 수학에서 정의하는 점, 선, 면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약속이다. 우리가 점, 선, 면에 대한 이런 약속을 준수하지 않고 임의로 정한다면 수학이라는 학문은 성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각자가 모두 자신만의 기준이 맞다고 우기면 어떤 체계나 건물은 올라갈 수가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하교를 허락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수학이나 다른 분야에서도 반드시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기본도형에 대한 정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외우고 익혀야 하는 대상이다. 내가 몇 권의 수학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어떤 것들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도형은 점, 선,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질문은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
단위 길이는 길이를 재는 기준이 되는 단위를 말한다. 예외는 있지만 세계적 공용은 미터법이라고 한다. 서울과 북극, 남극을 잇는 커다란 원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이 원을 ‘자오선’이라고 한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이 기준이 되며, 이 지점을 경도 0도라고 한다. 프랑스는 7년간의 노력 끝에 자오선의 길이를 알 수 있었고, 1799년 자오선을 4000만분의 1로 나눈 길이를 1미터라고 정했다고 한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세계 공통의 단위길이로 많은 국가에서 승인하고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단위 길이도 일종의 약속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가 만든 약속인 셈이다. 길이란 하나의 점에서 다른 점까지의 거리이다. 길이가 10미터라는 의미는 단위길이가 열 개가 있다는 의미다. 단위 넓이는 넓이를 재는 기준이다. 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은 가로*세로=넓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길이와 넓이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 길이는 폭이 없는 선이며, 넓이는 평면의 일부라고 한다. 길이를 몇 배 한다고 하여 넓이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길이는 폭이 없다. 넓이는 사실 한 평면에 단위 넓이가 몇 개 있는가를 나타낸다. 넒이가 2m²라면 단위넓이 1m²가 두 개 있고, 2cm²라면 단위 넓이 1cm²가 두 개 있다는 의미다. 해서 직사각형의 넓이= (단위 넒이)*(단위넓이의 개수) = (단위널이)*(가로의 길이)*(세로의길이)다. 가로가 3m이고, 세로가 2m 이면 단위넓이 1m*1m 사각형이 6개 들어있다는 의미다. 다른 이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무슨 큰 발견처럼 다가왔다.
다각형은 한 평면에서 선분으로 둘러싸인 도형이며, 변의 개수에 따라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등으로 불린다. 그럼 변의 개수를 기준으로 하니 삼변형, 사변형이라 하지 굳이 삼각형, 사각형이라 할까. /굳이 수학 용어들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보고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부르는 데에서 오는 혼란을 막기 위한 것/ /다각형을 ‘각이 여러 개인 도형’으로 바꾼다는 것은 수학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대각선은 다각형의 이웃하지 않는 두 꼭짓점을 이은 선분이다. 도형을 가지고 해체하고, 늘리고, 분해하고 선을 그어 보기도 하며 다각형을 가지고 온갖 장난을 하고 있다. 수학을 재미있는 놀이로 생각해보면 훨씬 재미가 있어 보인다. 노트에 우리는 별 짓을 다해 보아도 된다. 다각형의 꼭짓점 개수도 그려볼 수 있다. 실제로 그려보면 된다. 삼각형은 이웃하지 않는 꼭지점이 없으니 그을 수 없고, 한 꼭지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수는 사각형은 1개, 오각형은 2개, 육각형은 3개, 칠각형은 4개------이다. 밤새 그려볼 수도 있지만, 수학은 패턴을 찾는 학문이기도 한 듯 하다. 이것의 공통점은 꼭지점의 개수는 1개씩 늘어나고 그 꼭지점의 개수에서 3을 빼면 대각선의 개수가 된다는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오각형은 꼭지점이 5개니 대각선 개수는 5*2=10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복된 개수를 빼면, 즉 두 번씩 그어진 대각선을 빼면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수를 구할 수 있고, 이를 식으로 나타내면 2분의 n*(n-3)이 된다. 정 96각형은 2분의 96*(96-3)=4464개라고 한다. 원래 자연계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 수학적으로 발견하는 것인지, 아니면 수학으로 일정한 패턴을 잡아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이는 수학을 패턴과 밀접히 관련된 학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수학이란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일 듯 하다. 한 덩어리의 물체도 좋고, 하나의 사건이나 문제를 하나의 도형이라 생각하고 나누고, 곱하고, 더하고, 빼고, 대각선을 그어보고 하다보면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고, 그 법칙을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문제들을 보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난관에 부딪힐 때 분노를 가라앉히고 노트 한 권과 연필 하나를 들고 패턴을 알아보고, 공식을 정립해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가. 아니 어쩌면 그런 노력의 과정이나 시도가 문제 해결의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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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계사 강의>> 남희근 지음. 신원봉 옮김. 부키
남희근이 지은 <<금강경 강의>>를 구매할 예정이다. 남희근은 중국 대륙 출신으로 국민당의 패배로 장개석이 쫒겨날 때 대만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말년에 다시 대륙으로 회향하여 가르치다가 구십 중반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어느 동양학자가 한말 이후 한국의 학문 전통이 끊긴 것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한다. 역사적 대격변에 의해 조선을 거쳐 한국으로 학문 전통이 계승되고 축적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지배, 한국전쟁, 군사독재, 산업화 근대화를 거치면서 배격되고 버려졌고, 괄시받아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중국도 엄청난 난리를 겪었지만, 거대한 대륙이라서 그런지 워낙 축적된 전통이 강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학문적 전통이 어느 정도 계승되었고, 남희근은 그런 토양에서 영양을 듬뿍 받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들은 세 번의 민족대이동을 겪었다. 일제 지배에 따른 민족대이동,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이동, 산업화로 인한 대이동이었다. 남아난 게 있기나 했을까? 오직 유일한 인생의 목적은 ‘살아남음’이 아니었을까?
출근 버스 안에서 뉴스가 흘러 나왔다. 그 말들 좀 꺼버리면 안되냐고 말하고 싶었다. 정보, 뉴스, 소식, 해설 ,이치, 추측 등등의 말들, 소음, 소음---- 지독한 소음으로 들렸다. 공자의 계사전 12장 書不盡言, 言不盡意. 얼마나 담백한가. a²*b²=c² 얼마나 통쾌한가? 우리는 흔히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말자. 역사가 평가한다는 등의 말들을 주절거린다. 이번 사태의 진행을 보면서 소위 한국의 지배엘리트란 자들에겐 이런 말들이 가당치도 않구나 싶다. 이들은 지금의 사익은 지독히도 추구하지만, 역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다. 시인 김수영은 /풀/에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지 일어난다/라고 노래했다. 이제 이 싯구는 폐기되어야 한다. 바람이 불면 눕고, 바람 따라 울고, 바람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어차피 ‘민중’이란 썰물이 오면 썰물에 맡기고, 밀물이 오면 밀물에 맞춰 요령껏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김수영은 시인이라 이치가 아니라 情을 노래했고, 사실이 아니라 바람이나 이상향을 동경했을 뿐이다. 인간은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노령 운전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고 한다. 노령의 나이가 되면 운전이 곤란한 상태가 되어 사고 발생 비율이 높다고 한다. 한국은 ‘선거민주주의’국가다. 선거라는 수단으로 국가 엘리트를 구성한다. 노령 운전자에 대한 규제는 하는데, 노령 선거권에 대한 규제를 왜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제 손으로 먹고 입고 할 수도 없고,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인지능력이 급격히 감소된 자들에게 국가의 구성에 상당 부분을 맡겨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는가? 노령 운전자에 대한 규제는 상당히 동의하지만, 노령 선거권에 대한 제한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불가능하지 않을까? 왜 그럴까? 운전은 기술의 문제고, 선거는 인간 권리에 대한 문제라서 그럴까? 단지 나이가 들었다고 운전면허증을 주지는 않지만, 선거권은 일정 나이가 되면 자동으로 발급된다. 운전은 자격이 운전 실력이지만, 선거권의 자격은 자연적 연령이다. 즉 어느 나이가 되면 ‘인간’에 자동적으로 기입이 된다. 이상하지 않는가? 유교에서는 어린아이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탄식하곤 한다. ‘저게 인간인가?. 인간이 할 짓인가?’ 이 탄식에서 인간의 조건은 단지 자연적 연령이 아니다. ‘인간의 자격’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반론이 제기 될 수 있다. ‘평등권의 위배’다. 먼저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자. 인간은 인간 사회는 평등한가? 자본주의 사회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이 상시적이다. 모두들 경제적 불평등을 자연적 현상쯤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왜, 정치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할까? 인간 자격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저항할까? 경제적 불평등이 용인되면 당연히 정치적 불평등이나 인간 자격 불평등도 용인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본을 모으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데 반해 ‘인간’의 자격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천부적으로 주어져서 그런가? ‘동양’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듯하다. ‘어린아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훈련과 교육을 통과해야만 하는 모양이다. 계사전은 /역경/에 대한 공자의 서평, 혹은 해석서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역경은 /주역/이라고도 불린다. 주나라의 문왕의 역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흔히 주역은 제왕학이라고도 한다. 제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필독서라고 한다. 우리는 한 번쯤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인간’혹은 ‘인간의 자격’에 대하여, 하지만 지금은 ‘인문’의 때가 아니라, ‘장사꾼’의 때이니.
남녀 평등이 되니
영감이 말해도 일리가 있고
할망이 말해도 일리가 있다
음력과 양력을 합치니
너는 너대로 새해를 맞고
나는 나대로 새해를 맞는다.
마음이 심란할 때 /주역/을 읽고, 주역 해설서인 계사전을 펴본다. 몇 년 전에 남희근의 계사전을 읽엇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었는데, 이전 읽기에서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남희근은 /역경/을 변화의 학이라고 하고, 기호논리로 읽으라고 한다. 러셀이라는 철학자도 수학을 기호논리학으로 표현했다 한다. 음양은 거기에 무슨 가치의 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호라고 한다. 天高地卑(천고지비)는 하늘은 높고 땅은 비천하다가 아니라, 하늘은 높고 땅은 가깝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현대문으로 卑자를 읽으면 안된다고 한다. 고문에는 卑가 가깝다는 의미라고 한다. 단지 멀고 가까움을 의미할 뿐이라고 한다. 거기에 무슨 가치의 존비가 있겠는가? 선악, 존비, 등등은 단지 인간이 때에 따라 만든 가치 척도일 뿐이라고 한다. 남희근은 /역경/을 읽기 위해서는 64괘를 다 외우고 가지고 놀 수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즉 다 외우는 것이 비로소 역경 공부의 시작이라고 한다. 세상에 그냥 주어지는 것은 한 개도 없구나 싶다. 나야 어차피 /역경/을 공부할 수 없기에 가끔 ‘관광’을 하는 관광객으로 읽어 볼 뿐이다.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역경/은 동양고전(혹은 중국학)의 원류라고 한다. 동양의 사상사는 모두 /역경/을 원천으로 한다고 한다. 잠깐만 검색해 보아도 /역경/에 대한 책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관광객으로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변화에 대한 그렇고 그런 것. 세상사에 대한 그렇고 그런 것, 인간에 대한 그렇고 그런 것. 우주에 대한 그렇고 그런 것. 그렇고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저자에 의하면 공자는 계사전에서 인문의 가치를 세우고 싶어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문이란, 인간이 세상을 만들고 세우는 것이라고 하는 듯하다. /역경/의 위대함은 어떤 종교적 방법(하나님이니 부처니 하는 초월적 존재에 의탁)도 배제하고 기호논리로 세계를 해석하고 세계를 개조하려는 시도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나 부처나 알라가 아니라 성인이 최고 경지다. 천과 지가 망친 세계를 ‘인문’으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라고 한다. 이런 걸 공자의 ‘인문학’이라 할까? 인간의 최고 단계가 성인일까? 성인은 변화를 읽고 변화를 따르고 때에 따라 혹은 맞게 인류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자다. 남희근은 강연 의뢰를 받았는데, 제목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였다고 하여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인생의 목적은 인생인데 무슨 강연을 해달라는 이유였다고 한다. 공자는 계사전에서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가치를 논했다고 한다. 인간이 아니라, 사자를 상대로 강연를 한다고 상상해보자. 사자들 앞에서 너희들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꼴이다. 사자에게 굳이 인생의 목적이 있다면 좋은 사자가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럼 좋은 사자란 어떤 것인가? 하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인간에게는. 좋은 인간이란? 하고 물을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공자에게 성인은 천지(세계)에 혹은 천지인(인간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간이 아닐까?
하늘은 사람을 낳아 만물로써 길렀는데
사람은 하늘에 대해 조금도 보답하는 것이 없다.
殺! 殺! 殺
殺! 殺! 殺! 殺!
/금강경/에서는 “여래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고 한다” 하였다고 한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렇게도 안되고 저렇게도 안되고. 인생의 고단함이요, 어찌 한국이라는 사회의 수준이 총잡이 한 명 혹은 그 집단들을 제거하지 못하는가? 법치의 때가 아니고, 인문의 때가 아니라, ‘무력’에 시대 ‘무지’의 시대, ‘장사치’의 때. ‘나르시시즘’의 때인 걸 어쩌겠는가? 이것도 사회고 저것도 사회고,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인간은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공자는 말하는 것도 같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인문’은 역경은 계사전은 인간의 길(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가?
百物不發 (백물불발)懼以終始(구이종시) 其要无咎.(기요무구)
모든 것을 포괄하며 시종 삼가는 것이다.그 요점은 허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역경/을 세상을 치료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變化云爲(변화운위) 변은 원칙이요. 화는 영향이요. 운은 말하는 것이요. 위는 그것을 진행하는 것이다.
세상사가 힘들 때 주역을 읽어보자.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살고 또 살고 또 살아야 하듯이.
언제가 되어야 글다운 글을 한 편 써볼 수 있을는지. 나를 포함하여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말자.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생존하고 (밥 먹고, 자고, 싸고) 번식하느라 겨를이 없다. 역경의 글자 한 자 한자는 허투루 쓴 자가 한 자도 없다고 한다. 예전 중국에서는 신하가 상소를 올리려 갈 때면 관도 준비하여 갔다고 한다. 말에 글에 정치적 발언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선거민주주의에 가장 큰 폐단 중 하나는 선거권자는 아무런 책임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소비자일 뿐이고 배설하는 자일 뿐이다. 그런 때이고 그런 때인 것이다. 뭐 그렇고 그렇고 그렇고 하는 것이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이 시구는 /역경/의 원리를 말하는 것 같다. 당시에는 소시민을 노래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때가 변했으니 다르게 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소위 ‘민중’이 아니라, 고독한 시인 자신, 혹은 고독하고 불우한 공자. 신에게도 초월적 존재에게도 미신에게도 의탁하지 않고 변화를 읽고, 신에게도 초월적 존재나 천국이나 지옥에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있는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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