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통의 하루] 서평쓰기

  • 작성기간 : 2025.9.16 ~ 9.30
  • 작성기준 : 오산시 도서관 대출도서에 대해 공백 제외 500자 내외 서평작성
  • 시상내용 : 추첨 통해 60명에게 북커버 증정 및 우수 서평 20명 선정 2025년 11월부터 1년간 대출권수 2배 제공(문학 상주작가 심사)
  • 선정공고 : 2025.10.15. 도서관 홈페이지 공지사항
  • 기념품 수령 : 2025. 10.21 ~ 10.30
  • 수령장소 : 중앙도서관 자료실
  • 문의 : 031-8036-6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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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부신 안부 : 백수린 장편소설
    저자
    백수린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발행연도
    2023
    작성자
    이*린
    작성일
    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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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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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회사에서 동료와 책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이 책은 회사 동료가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여 대출하게 되었다.
    오산시 도서관은 역의 스마트 도서관, 전자도서관도 잘 되어있어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들었는데 어렵지 않게 오산시전자도서관에서 대출할수 있었다.

    '눈부신 안부'라는 제목부터 어떤 내용일까.. 약간은 잔잔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흥미진진, 가독성이 좋게 쭉쭉 읽어 나갈수 있는 재밌는 책 이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가족의 아픔을 지닌 주인공이 아픔을 잊고자 한국이 아닌 독일로 떠나 생활하게 된다. 같이 독일로 간 엄마와 동생을 보면 그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곳에서 돌보아 주는 파독간호사 '선자 이모' 를 만나면서 한 소녀의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관계가 소중해지고, 소통하고 나누며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였다.

    마지막 반전의 이야기가 있다면 선자이모에 관한 비밀이 있다는 것.
    서평에서 쓰면 같이 책 읽는 사람으로써 실례라... 비밀을 하나 둘씩 열어가면 읽어나가시기를 추천한다.

    사람은 각자 주머니속에 무거운 돌을 감추고 살아간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그러리라 생각되고 나역시 그렇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각자의 무거운 돌을 항상 지니며 살아간다. 인간이라면 숙명이 아닐까.
    그 안에서 무거운 돌이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건 타인의 건네는 안부때문이 아닐까..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그 따뜻하고 눈부신 안부 덕분일 것이다.

    읽는내내 따뜻한 온기를 머금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저자
    임세원 지음
    출판사
    알키
    발행연도
    2016
    작성자
    이*경
    작성일
    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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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였습니다. 조울증을 앓던 자신의 환자에게 피살당합니다. 유튜브 채널 뇌부자들의 두 의사 김지용, 오동훈 강연을 들었을 때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해서 읽었습니다. 저자에 대한 소개는 강연에서 들었고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충격이었으나, 저도 현실을 살아내다 보니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은 남아있었습니다. 저자가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아픈 사람의 아품을 보고 듣고 함께 말하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려하는 마음, 열심히 살아간 그의 삶. 난로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에우독소스가 들려주는) 비 이야기
    저자
    김승태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연도
    2008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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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우독소스가 들려주는 비 이야기>> 김승태 지음. 자음과 모음.

    //엄정한 이성의 도덕에 의한 도움이 없는 사회에서, 실천적 지혜란 이해와 거래의 계책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그것은 공동체의 이해관계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간단한 손익 계산을 넘어가는 생명의 이해를 포함한다.---실천적 지혜가 공동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 문화의 시대에 있어서 그것의 이해관계로서의 성격은 쉽게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우창의 <깊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이론’은 없고 ‘의견’만이 활개치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의견은 이론처럼 논리적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증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토론이라는 방해꾼을 몰아낼 수도 있다. ‘의견’은 그냥 누구든 말을 하고 주장을 하면 된다. 의견은 개인들에게 약간의 해방감을 줄 수 있고, 의견을 낼 수 없었던 사람들 누구도 의견을 낼 수 있는 ‘권력’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의견은 그냥 의견에서만 멈추어 있고, 소통과 관계에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의견이 이론에 의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의견이란 이해와 계책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의견이 많은 시대이지만, 가장 소통이 안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넘치는 의견에 또 의견을 보태기 미안하여 고육책으로 가끔씩 수학책을 읽는다. 종교나 점집을 찾고 멘토를 두는 것도 좋겠지만, 체질에 맞지 않고 인생에서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는 생각도 그 길을 단념한 이유다. 삶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늘 헤매기 마련이다. 수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명증하고 확고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수학이란 늘 헤매야 하고, 증명도 해야 하고 반증도 거쳐야 하고 앞에 언제나 난제들이 등장하고 문제들을 풀어가는 끝이 없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생명의 이해’가 걸린 시장에서 앞에 닥친 문제들을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해결해 내야 한다. 회사나 직업에서 퇴출되지 않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수학책을 읽는 이로움 중 하나는 이런 삶의 기술들을 훈련할 수 있어서다. 다행히 수학에서는 공리나, 정리 등 ‘엄정한 이성의 도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방이 두 개인데 침대도 두 개가 있었다. 큰 방 큰 침대를 버리고 작은 방 작은 침대를 그 자리로 옮겼고, 거실에 있던 옷 장 두 개를 작은 방으로 옮겼더니 집이 사막처럼 넓어졌다. 그 외 자질구레한 것들을 버리기로 하였다. 원래 크기는 그대로인데 버리니 넓어졌다. 무슨 대단한 실천적 지혜가 아니라, 단지 비(비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침대가 없으니 집이 비례하여 넓어졌다. 기억에 의하면 아파트 24평이 한때는 ‘국민평형’ 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32평 정도가 그 지위를 차지하는 모양이다. 그동안 사람들의 신체가 커진 것도 원인이겠으나, 사실은 그 자리를 물건들이 차지한 영향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싶다. 대형화되고, 개수도 늘어나고, 온갖 신기하고 세련된 것들이 차지하며 넓힌 것이리라. 물건이 증가하는 비와 평수의 증가는 比의 관계에 있다. 넓이는 정해져 있지만 比를 통해 많은 것이 설명되고 해명될 수도 있지 않을가. 가령 ‘행복’에 대해서 애기해 볼 수는 없을까? 마음이나 심리적 이유가 아니라, 비의 관계로 이해해 볼 수도 있지 않을가. 소유의 증가와 행복의 양의 관계, 물건들의 다소와 행복과의 관계, 걷는 거리와 행복, 주위 십 미터 내 나무 개수와 행복의 관계 등등. 그럼 애써 멘토를 찾아 나서기보다 비를 조정하여 행복을 증가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피라미드 높이를 어떻게 알수 있을가.? 피라미드 근처에 1미터 막대를 한 개 세워서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한다. 막대 높이. 막대 그림자 길이, 피라미드 그림자 길이가 나온다.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측정값을 대입하여 비례식을 적용하여 피라미드 높이를 알수 있다. 막대의 높이 : 막대 그림자의 길이= 피라미드의 높이: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 에라토스테네스는 2,300년 전에 지구 둘레를 거의 정확하게 측정하였다고 한다. 태양광선의 기울기를 비로 하여 측정하였다고 한다. 기준점에서 800킬로 떨어진 곳의 태양광선의 기울기가 7.2도였다. 7.2도 : 800= 360도 : x. x=800*360 나누기 7.2 x는 40,000. 혹은 내항 곱하기와 외항 곱하기는 같기에 7.2*x =800*360은 40,000.
    메멜라우스의 정리- 한 직선이 ∆ABC의 변 또는 그 연장선과 만나는 점을 각각 X ,Y,Z라 하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 * = 1 몇 번을 증명을 따라가다가 그만두었다. 몇 번 더 반복하여 증명을 익혀야 하는데 어렵기도 하고 짜증이 올라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자의 특권이자 자유다. 이 시리즈물은 절반 정도까지는 초등학년 혹은 중학교 초반 수준이라 무난한하다. 중반 이후에 좀 더 어려워지다가 후반부에는 많이 어려워진다. 저자는 중학 고학년이나 고등학교 수준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만만치 않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수학도 익히고 계속 반복하여야만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다.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개도 없는 모양이다.
    아라비아 상인에게 낙타가 17마리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큰애 , 둘째 ,
    막내 를 갖도록 하였다. 첫째 : 둘째 : 셋째 = : : . 2, 3, 9 최소 공배수로 통분하면 : : = 9 : 6 : 2. 각각 9마리, 6마리, 2마리가 된다. 남들은 시시해 보일지라도 나를 짜릿하게 한다. 처음부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런 기초적이고 간단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훈련이 충분히 축적되어야만 더 높은 단계를 도전해 볼 수 있다. 입문 단계에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주체와 대상이 있다. 대상은 우리의 외부 세계다. 주체 : 마음 = 대상 : 수학 이런 비례식은 없을까? 만약 이런 식이 성립한다면, 우리네 삶은 이 比를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난제 중 난제다.

  • 사림열전. 1 : 소쇄원의 바람소리
    저자
    이종범 지음
    출판사
    아침이슬
    발행연도
    2006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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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열전1 (소쇄원의 바람 소리), 사림열전2(순례자의 노래)>>
    이종범 지음. 아침이슬.

    홀로 한가롭게 살아 오가는 이도 끊겼으니
    다만 밝은 달 불러내서 차가운 외로움을 비추어볼 뿐
    그대는 번거롭게 나의 살림살이 묻지 말게
    두어 이랑 뜰이 물안개 자욱한 첩첩 산중에 있다네.

    조선 시대 대표적 사림 김굉필의 <마음을 풀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야생의 인간이든 현대 도시의 인간이든 인간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무질서라고 하였다.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인간들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일상의 자잘한 것부터 밤하늘의 무질서하게 널린 별에게도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동식물에 대한 분류에서 친척관계 혹은 혼인에 이르기까지 어떤 질서를 부여해 왔다고 한다. ‘구조화’해 왔다고 한다.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을 파고들면 그들의 생각의 방식도 알 수 있다고 하는 듯하다. 대출 기일을 연장해 가면서 두 번에 걸쳐 읽었는데, 막상 독후감을 쓰려니 가닥을 잡을 수 없어 심심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책을 읽고 난 후 한동안 독후 감상문을 쓰지 못한 이유는 ‘질서’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며칠을 묵히고 되새기다 보면 어떤 맥락이나 키워드가 갑자기 떠오르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뭔가를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떠오르지 않으면 마냥 속앓이를 하지 않았나 싶다. 꼭 책읽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이나 직장에서도 그렇지 않았나 싶다. 가닥이 잡히지 않고 무질서하게 현상이 널려 있으면 뭘 어떻게 해야할지 헤매지 않았나 싶다. 그때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질서를 만들려고 하였지 않았나 싶다. 그럴 경우에야 비로소 가중치를 둘 수 있고 일의 순서를 정하고 해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나 싶다. 그 한 가닥을 풀면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지 싶다. 무질서한 상태에서는 많은 노력과 공을 들일지라도 헛일이 되기 십상이다. 심심해서 수학 책을 여러 권 뒤지며 느낀 점이 있다면, 수학 문제를 받아들면 먼저 해결할 욕심에 무턱대고 매달리기보다 찬찬히 살피고 궁리를 하며 ‘원리’나 ‘질서’를 먼저 구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더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매번 새로운 일과 난제가 연속해서 생긴다는 의미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고 살아있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닐까. 날마다 나타나는 사건을 육박전으로 싸우다 보면 인간은 곧 고갈돼 버릴 것이다. 가끔은 멀리 물러나서 찬찬히 살펴보고 고요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제 위치가 어떻든 간에 병졸이 아니라, 장군이 되어 전쟁의 ‘질서’를 알고, 그 ‘질서’를 바꿔보는 것도 필요치 않을까 싶다. 용감한 군졸은 적의 참호를 파괴할 수 있지만, 위대한 장군은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과장된 주장일지 모르지만, 그런 역할을 ‘인문학’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든 ‘공부’를 하다보면 그런 능력이 생길지도 모른다.

    한 문명을 모아놓은 곳이 박물관이라면, 박물관이란 지나간 일들의 모든 잡다한 것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는 질서가 있다. 역사란 일어난 모든 일을 나열한다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회란 단순히 사람들의 모아놓은 장소가 아니다. 거기에 질서가 있기에 사회가 형성되고, 그럴 때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고려를 계승한 국가가 조선이다. 고려의 무질서를 극복하고 조선이라는 질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이념은 불교였다고 한다.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 개창한 국가가 조선이고,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서구가 자유주의를, 중국이 공산주의를 채택한 것과 비슷하다. 하나의 사회는 이렇듯 하나의 질서 체계가 있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성리학(유교)를 국가이념으로 개국하였다. 이어가다가 제 7대 세조가 성리학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계유정란을 일으켜서 왕권을 찬탈한다. 현대적 의미로는 쿠테타를 일으켰다. 세조를 이은 성종 대 훈구파 대신을 ‘간귀’라고 지목한 사건을 계기로 사림(선비의 숲)이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사림은 세조의 쿠테타에 반대한 세력이고, 훈구파는 쿠테타에 가담한 세력이다. 사림파는 ‘공적보다는 진실, 공리보다는 의리가 소중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이들을 흔히 절의파라고 한다. 그후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을 지나 선조 대에 사림이 탄압을 이겨내고 권력에 어느 정도 안착 했고, 그후 정치는 훈구파와 사람의 대결이 아니라 사림 내 붕당 정치가 자리한 듯 하다. 역사를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지만,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보인다. 세조의 즉위한 1455년대부터 선조가 즉위한 1567년까지 근 백년 동안 사람은 네 번의 사화(선비의 재앙)와 크고 작은 사건으로 씨가 말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사림열전1은 16세기 호남 사림에 대해, 사림열전 2은 14세기 사림에 대한 열전이다. 씨가 말릴 정도로 탄압을 받으면서도 왜 그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을까. 저자는 /하늘의 뜻과 인간의 길을 공부한 선비의 선택은 분명했다. 죽임을 당하고 유배를 당하였으면 모르되 조정에 머물거나 나설 수 없었다/고 한다. 정치에 뛰어들거나 관련을 맺은 자는 죽음과 유배을 당하였고, 낙향하여 산림에 묻힌 자들은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희망을 노래하고 미래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책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림에 대한 열전이다. 열전이란 기전체 역사 기술 방법으로 사람의 전기를 기록하여 역사를 쓰는 방식이라고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행장을 기록하여 당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저자는 역사의 진정한 가치는 승자만이 구가하는 것이 아니고 패자를 통하여 구현되는 것이며, 진실의 힘이야말로 훗날의 아름다운 생명의 원천이 된다는 점을 새삼 들추고 싶다고 했고, 이 책은 아름다운 패자를 위한 예찬이며 희망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에 바치는 노래라고 한다.

    지금은 유교나 성리학의 전통을 찾아보기 힘들고 , ‘근대화’ 구호가 세상의 모든 가치를 집어삼켜 유교는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쳐져 버려야 할 퇴물로 취급받았다. 참고로 ‘근대화’라는 것도 하나의 통치이데올로기였다. 유교나 성리학이 지금은 개인의 안녕을 위한 지침서 정도로 이용되고 있을지언정 당시에는 혁명적 사상이었다고 한다. 세상을 개조하려는 야망과 포부를 지닌 철학이었을 수도 있다. 먼저 역사는 당대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이유가 없다면 조선이 불교를 버리고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사림의 등장을 비판언론의 형성, 기억 운동, 학문 권력과 철학운동 새로운 윤리관과 삶의 가치의 문제와 밀접히 관계되었다고 한다. 사림은 비판 언론을 형성하고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하였고, 사라지고 잊혀진 사건을 재조명하고 진상을 끝까지 캐내려 하였고, 학문을 발전시켰고, 이 땅에서 철학 논쟁의 시발점이었고, 새로운 윤리관을 정립하려고 하였고, 삶의 가치를 무엇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와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훈구공신의 권력과 재화에 대한 집착은 가히 ‘일가주의’라할 만한 것이었다. 수기치인을 통하여 세상과 더불어 착함을 이룬다는 ‘겸선천하’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정변과 찬탈에서 건져낸 서글픈 전리품이다// 내 나름대로 지금의 상황을 여기에 대비해 보고 싶다. 한국의 지배층과 한국인들의 권력과 재화에 대한 집착은 가히 ‘일가주의’라 할 만하다. 수기치인을 통하여 세상과 더불어 착함을 이룬다는 ‘겸선천하’의 이상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한국전쟁과 군사 쿠테타, 오랜 독재 경험, 근대화, 신자유주의 등에서 건져낸 서글픈 전리품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현대사에 오버랩시켜 보았다. 세조의 쿠테타를 박정희의 쿠테타로, 소위 민주화 ‘운동권’의 형성을 사림의 등장으로, 세조 이후 백 년에 걸친 사림에 대한 멸족을 박정희 쿠테타 이후 몇 십년에 걸친 ‘빨갱이 사냥’으로.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신과 학문과 역사에 대한 투쟁.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는가 보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출근해야겠다.

    나그네 취급도 못 받아도 성나지 않네
    산중에 세속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외로운 구름 밝은 달과 함께
    오래도록 신선 동네의 손님이 되리라

    김시습 /세속을 끊다/

  • 에티카
    저자
    B. 스피노자 지음 ; 강영계 옮김
    출판사
    서광사
    발행연도
    2008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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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수

    <에티카/정치론>> 스피노자 지음. 추영현 옮김. 동서문화사

    최근에 알뜰폰으로 갈아탔다. 우연히 매장 앞을 지나다가 아주 저렴한 사용 금액을 보고 변경하였다. 지금 사용하는 핸드폰은 십 년도 넘었는데, 거기에 새로운 칩만 갈아 끼우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좀 더 빠른 최신폰으로 바꾸길 권유하였지만, 내 대답은 이랬다. 내가 느린데 핸드폰이 빠른 게 무슨 소용입니까. ‘세계화’가 찬양될 때 다른 쪽에서는 ‘지역성’을 주장하였던 적이 있었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놓았던 것 같다. 아무리 세상이 높고 빠르고 넓어져도 각자는 지역성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럼 이 양자를 어떻게 조화시킬까. ‘세계화’는 시대의 흐름이고, 각자는 지역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자신이 사는 곳에서 세계인이 되는 것일까. 지금이야 세계화니 지역성이니 다 지나가 버린 질문들이지만.

    당시에 철학 분야 책을 들춰보면 스피노자라는 이름을 자주 접했던 기억이 난다. 이 사람의 책을 읽어보자 하여, 구입하여 오래전에 읽어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어 한동안 묻혀두었다. 그러다 직장에서 틈틈이 들여다 볼 책을 물색하던 중 이 책을 발견하여 회사에 가져가서 아주 잠깐씩 가끔 읽은 지 꽤 되었다. 어차피 시간을 떼우기 위한 용도라 그냥 읽었다. 방치하다 읽다를 반복하다가 이제 다른 책으로 교체하기로 예정하고 큰 제목이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하였다. 그러다가 뭔가를 발견하였다. 그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에티카는 총 5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신에 관하여 쓰여 있다. 1부의 부록을 읽다가 발견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쓰고 있는 내용은 제 1부의 내용을 읽고 느낀 점만을 쓰고 있다.

    //그들의 내재적인 무지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런 낡은 조직 전체를 파괴해서 새로운 조직을 대치하는 것보다 그들로서는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그들의 ‘내재적 무지’를 드러내고, 새로운 조직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혁명적 시도라 할 수 있다. 그 후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로 낙인찍혀 파문당하고 꽤나 삶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도망자, 망명자, 방외인 등으로 살았던 듯하다. 나 같은 속물들은 그냥 시세에 맞게 살면 되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먼저 묻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앎’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 아니 일단 안 이상 그것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르면 약이고, 알면 병’인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지’는 당대의 생존에 유리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피노자는 ‘내재적 무지’를 어떤 방법으로 대항하려고 하였을까.

    //목적에 관계없이 다만 도형의 본질과 특질만을 문제삼는 수학이, 인간에게 진리에 관한 다른 규범을 명시하지 않았더라면, 위와 같은 이유 하나만으로도 진리는 인류에게 영원히 감추어진 채로 있었을 것이다// 1632년 네덜란드 출신인 스피노자 시대에 새로운 진리 탐구 방법으로 수학이나 과학이 대두되기 시작한 듯 보인다. 그는 ‘신’을 믿음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수학적 방법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우선 ‘정의’ 하고, ‘공리’를 세우고, ‘정리’ 하고 ‘증명’ 하는 식이다. 당시 사람들은 신을 //신 자신이 모든 것을 일정한 목적으로 확실히 이끌어 간다고 믿었다. 그들은 신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창조하고, 또 신을 숭배하도록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신들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빚을 지움으로써 최고의 존경을 받았고.---이런 편견은 마침내 미신으로 전락하여 인간의 마음 깊숙이 뿌리박혔다// 신을 창조자 목적인으로 믿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스피노자는 신의 존재는 ‘필연성과 유일성’ ‘자유원인’ ‘절대적 본성’, ‘무한’, ‘내재성’ 등이라 한다.. ‘무한히 많은 변화를 하면서도 항상 동일함을 유지하는 우주의 모습’이다. 즉 선, 악, 질서, 혼란, 따뜻함, 추위, 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완전한 존재자라고 한다. 창조자, 인격신으로 신을 대할 때는 언제나 ‘믿음’이 절대적이지만, 그냥 완전하게 거기에 있는 신을 대할 때는 ‘지성’이 중요하다. 스피노자에게 지성이란 신을 아는 것이고, 이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음. 일테면 하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의 차이가 아닐가? 신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인격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재하는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을 아는 것이다. 이 차이는 사실 대단히 큰 차이다. 스피노자가 21세기 한국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면, 분명 이단자로 취급받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아는 한 기독교의 주류는 아직도 ‘믿음’만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설명하지도 근거를 될 수도 없지만, 주역이나 유교에서의 하늘과 비슷해 보인다. 스피노자의 ‘변태’ 니 ‘속성’이니 하는 개념은 주역에서 시와 때를 안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신에 관해 정리를 한 후 스피노자는 정신의 본성, 감정의 기원, 인간의 예속과 감정, 지성의 능력과 인간의 자유에 관해 논한다. 이후 정치론까지 넓힌다. 늘 모든 철학적 논쟁은 필연적으로 정치론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정치란 우리 모두의 문제니까. 철학이 개인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면 그것은 철학의 불구가 아닐까. 이것은 또 기회가 있으면 읽어 보기로 하고 미루기로 했다. 아무래도 수학적 방법론은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보다 읽기에 무척 힘이 들기 때문이다. 최근 역사학자 이종범의 /산림열전/을 읽고 있다. 15세기 16세기 조선의 ‘사림’ , ‘선비’, ‘철학자’들의 대한 책이다. 스피노자와 비슷한 시기의 인물들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스피노자와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비슷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잘 모르지만 ‘사단칠정론’, ‘리기론’ 등과 이황과 이이의 논쟁,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 등이 비슷한 철학적 의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가까이 그들이 있는데 저기 멀리 있는 스피노자만을 ‘철학자’로만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부끄러웠다. ‘근대’ 초기에 스피노자니 갈레레오 등의 학자들이 수난을 당했다고 분개하였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러 번의 ‘사화(선비들의 재앙)’에서 수 백 수 천의 철학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도 무지하였다. 아무래도 ‘사화’를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치졸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 일제 시대의 역사관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싶다. /산림열전/을 읽으면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확장되고 넓어진 후에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역성’은 ‘세계성’을 만날 때 지역화가 되는 것이 아닐까?, 스피노자에게 ‘행복(최고의 삶,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은 신을 더 많이 아는 것이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란, 세계를 사랑하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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