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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마음의 생태학(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김우창 지음. 감영사
//우리 마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희생함으로써 전문적인 직업과 특정한 의무에 헌신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외면하고 살고 있다. 우리의 욕망을 위해 내버린 시간들-이익과 경제적 가치의 관점에서 값 없다고 버려버린 숱한 그 시간- 그 무가치를 무릅쓰고 그러한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운 좋게도 일하는 중 비는 시간이 조금 있다. 책 한 권을 책상 아래 놓아두고 꺼내 읽곤 한다. 틈나는대로 아주 조금씩 읽기도 하고, 며칠 들여다보지 못할 때도 있다. 꽤 오랜 시간 책상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책을 비로소 집으로 이송했다. 한 번만 읽었을 때는 약간 시시하였다. 다시 읽었을 때 깊은 울림이 있었다. 지금은 할 수 있다면 읽은 책을 두 번 정도 읽으려고 노력한다.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깊이를 조금 맛볼 수 있다. 2차원은 평면이고 너비만 있고, 3차원은 입체이고 깊이가 있다. 읽은 책 권수가 아니라 이제는 중량감을 체험하고 싶다. 가볍고 날렵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깊이를 추구하고 싶다. 된장도 김치도 제 맛을 내려면 오래 묶어야 한다지 않는가. 패스트푸드와 패스트책이 범람하는 듯하다. 언제적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일과 중 점심을 근처 프랜차이즈 식당이 아니라, 멀고 번거롭지만 프랜차이즈가 아닌 식당을 물색하여 한 끼를 해결하곤 한다. 이런 식당들이 외곽으로 밀려난지는 꽤 된 듯하다. 건강을 위해서나 미식 취미 때문이 아니라, 우선 달고 짜고 맛있는 음식이 불편해졌다. 그곳에는 아르바이트생이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만든 음식이 아니라, 나이 지긋한 주인이 있고, 오랜 체험과 솜씨로 만든 음식이 있는 듯하다. 혀가 아니라 속을 달래 줄 음식. 현실적 여건이 되고, 참고 견딜 힘이 남아 있다면 김우창이 쓴 전집 모두를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달랑 한 권의 책을 읽고 김우창의 사유를 읽어낼 수가 없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한 인간을 읽어낼 수 없는 이치와 상통하지 않을까 싶다. 깊은 사고와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깊이를 위해서는 숱한 시간을 버려야 하고, 무가치를 무릅써야 한다. 이것을 감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김우창의 사유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그의 책을 들고 오랫동안 혼자 앉아서 시간을 버리고 무가치를 무릅쓸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가치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한다. 바쁜 현대인에게는 한가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김우창은 한량들을 독자로 하여 책을 쓴 게 아니라,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글을 새긴다. 다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가. 이 책은 단연코 ‘인간’에 대해 썼고, 그 인간의 ‘마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이다. 그 인간은 생물적 인간도 물리적 물질적 인간도 아니다. 그냥 ‘인간’이자, 마음을 가진 인간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인간의 수많은 속성과 특징을 가진 생명체이다. 어느 화가가 인간을 눈으로만 표현 하듯이, 이 시대는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만 주조하지 않았나 싶다. 다른 모든 특성들은 종속변수다.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를 철저하게 경제적 동물로 개조할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고뇌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강대국이 전쟁로봇을 개발하느라 경쟁한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전쟁로봇은 사람을 살상할 때 단지 제거해야 할 목표로만 간주하지 인명 살상에 대한 고민과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제동물로 개조되면 도덕이나 윤리나 마음의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은 경제동물로 완전히 제조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생명체는 ‘정신’을 지녔기에 불가능할까. 그러나 인간을 경제동물로 개조한다는 의미는 몸이 아니라, 정신을 경제동물화 한다는 의미리라. 김우창은 책 전체에서 정신이란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 ‘마음’이라는 말은 숱하게 쓴다. 우리에게는 이 마음이 있기에 불가능하다고도 하는 듯하고, 마음만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도 하는 듯하다. 정신과 육체라고 하면 정신은 따로 떼어낼 수 있다는 뉘앙스를 주지만, 마음은 인간의 구성요소이자 내재된 기관 같은 느낌이다. 즉 인간에게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듯하다. 생물학자가 세포니 DNA에 대해, 물리학자가 원자나 분자에 대해, 인문학자인 김우창은 마음에 대해 탐구한다. 세포,원자 등은 과학-과학적 사고-이라면, 마음에 태한 탐구는 그래서 생태학인가?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깊이의 생태학은 삶과 마음가짐을 산업주의와 기술문명의 테두리에서 빼어 내어 근원적인 것으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본다.----오늘의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크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이다.-----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은 깊이에 대한 감각이다.// 김우창의 사유에 대해 물어봐야 소용 없다.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김우창을 읽는다는 것이 바로 깊은 마음의 근원을 찾는 여정이고 구도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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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다노가 들려주는 확률 1 이야기>> 김하얀 지음. 자음과 모음
언제 읽나 걱정만 하다가 반납일이 임박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초등학교 수준의 내용이라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수학 수준은 아직도 초등학교에 머물러 있다. 어느날부터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고 있다. 대신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보고 있고 듣는 시간이 늘었다. 눈도 침침하고, 그 또한 지루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여 이용을 자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쉽지가 않다. 밤은 길고 일상은 그만큼 늘어졌다. 마땅한 오락거리가 부재하니 SNS로 달래고 있었다. 달리 배운 것이 없기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지 않는다면 책을 읽거나 뭔가를 써야 한다. 남들은 뭣들 하고 사는지 늘 궁금하다. 스마트폰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지고 더 많은 품이 들어 게으름을 피우는 날이 많다. 뭐든 읽어야 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써야 한다. 이 책에 소개된 카르다노는 수학자이자 의사이며 사진기의 선구자이며 물리학자다. 특히 대수학에서의 업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1501년에 태어나서 1576년까지 살았으니,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학문이 세부적으로 전문화되지 못하여 여러 방면에 직을 가지고 있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전문가의 시대가 아니라 ‘학자’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전문가가 한 가지 일에 정통하다면, 학자는 전반적인 지식에 관여하는 자라는 의미로 학문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수학이란 학문이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지식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지식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전문지식이 아니라, 교양으로서 지식. 입학하면 쓰기와 읽기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수학(수의 대한 지식)을 같이 배운다. 읽기와 쓰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실 수에 대한 지식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익히고 훈련되어 왔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아니라, 어른으로 길러지듯이, 이런 교육을 통해서 ‘근대인’이 되었던 것이다.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읽기와 쓰기 못지 않게 수학적 사고가 그만큼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확률이란 시험과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현상을 선택하고 예측,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편리한 도구라고 한다. 점쟁이가 치는 점이나 선거 때 실시하는 여론 조사도 사실 일종의 확률이라고 할 수 있다. 확률은 도박에서 예측을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도 한다. 확률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수로 나타낸 것이다. 누구나 예측을 하고 살지만, 늘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척도의 의미를 가진 수로 나타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모두 시간을 살지만, 시간을 개인의 감각이나 천체의 위치나 기온의 변화로만 짐작하기 보다는 척도로서 수로 나타낼 수 있다면 오차도 줄일 수 있고, 갈등도 피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하고, 공통의 기준을 마련할 수도 있게 된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거나, 다스리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수학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실 현대사회의 복잡함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돌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수학이 있어 가능할지도 모른다. 확률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같은 조건 아래에서 실험이나 관찰이 이뤄져야 하고, 그 관찰이나 실험이 횟수가 많아져서 일정한 값에 가까워져야 한다. 주사위의 모양이 같아야 하고, 1이 나올 확률을 알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이 던져보아야 한다. 그런데 수없이 많이 던져보는 대신 어떤 법칙을 발견하기만 하면 확률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법칙이나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아마도 수학이 아닐까? 수학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수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물론 수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 이 과정은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이것을 생략하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이런 사적인 글을 쓰며 느낀 것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어와 어휘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쓸수록 사전을 찾아보는 일이 더 잦아졌다. 번거롭지만 반드시 이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새겨 넣어야 한다. @어떤 시행에서 각 경우가 일어날 가능성이 같다면 어떤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사건 A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다. 또 이런 약속도 해야 한다. 1)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의 확률은 1. 2)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의 확률은 0. 3) 어떤 사건의 확률을 P라고 하면, P는 ㅇ과 1사이에 있다.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을 P라 하면, 사건A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은 1-P라고 할 수 있다. @사건 A,B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때, 사건 A 또는 B가 일어날 확률은 (사건 A가 일어날 확률) + (사건 B가 일어날 확률). @사건A, B가 서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 사건 A,B가 동시에 일어날 확률은 (사건 A가 일어날 확률) * (사건 B가 일어날 확률)이다.
아무리 정교한 확률의 이론을 세우더라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지나간 일들과 내일은 똑같은 조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날씨도 다르고, 기분도 달라지고, 경제적 조건, 관계도 같은 조건 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확률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같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가령 조건이 100가지라면 맞지 않는 조건을 제거하여 30가지만 남겨서 그 조건으로 예측하거나, 가능한 한 많은 자료(200가지)를 얻어서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은 억지와 신념일 수 있고 희망이나 기적에 기대하기에 가깝거나, 현실을 임의로 조작하는 결과를 가져와 예측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방법은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 않을가. 더 많은 것들을 참조할 수 있어서다. 확률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지만, 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적어도 실패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수학은 차가운 학문이다. 우리 사회는 열에 들 뜬 환자처럼 모두들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수학이라는 차가운 욕조에 머리를 적셔 냉정한 사고를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름다움은 열정에서가 아니라 이런 차가움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정확한 동작과 절도 있는 자세에서 아름다운 몸짓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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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2. 3>> 김봉렬 글. 이인미 사진. 돌베개
//건축은 시대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요, 깨달음과 생활이 만든 환경이며, 인간의 정신이 대지 위에 새겨놓은 구축물이다// 저자는 젊은 날 이런 생각으로 한국의 역사적 건축을 바라보며 <한국 건축의 재발견>이라는 이름으로 3권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 후 여러 변화된 환경과 미흡하고 불비하고 오류가 많아 10년 후에 <한국건축 이야기>를 개정판으로 출판하였다. 개정판이 2006년이고 초판 원고는 1996년에 월간 /이상건축/에 연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판은 1999년 출판되었다. 초판 서문 /폐허 앞에서/는 건축을 통해 역사를 읽고, 인간을 읽고 싶었다. 거꾸로 역사를 통해 건축의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1권은 시대를 담는 그릇, 2권은 앎과 삶의 공간, 3권은 이 땅에 새겨진 정신, 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가끔 휴가가 주어지면 고택을 방문하여 머물곤 한 적이 있다. 휴가철이 한참 지난 후 휴가를 가곤한다. 번잡하지 않아서 좋고, 가끔 운이 좋으면 유서 깊고 넓은 고택을 혼자서 차지하며 호사를 누릴 때도 있다. 고택에서 휴가를 보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딱히 없지만, 그곳에서는 잘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된 건축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곳에는 오랜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고, 사람이 살아가는 흔적과 생활이 켜켜이 쌓여있다. 도시 생활의 많은 관계들이 일회성이고 이해 관계에 얽히고, 속도가 인간이 감내할 수 없게 빠르다. 온갖 소음과 소란는 또 어떤가. 가끔 이런 것들을 피해 오래되고 낡고 때가 묻고 느린 공간이 큰 매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현대적 시설에 비해 또 얼마나 불편한가? 그 불편함이 또 얼마나 정겨운가? 건축학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나는 건축가나 건축학자들을 단지 기술자가 전문가로 분류하는데, 때론 철학자이고 역사학자이자 인문학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기가 나고 질투가 나곤 한다. 그러나 한편 곰곰 생각해 보면 그들은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인문학자가 되어야 하는 듯도 하다. 건축은 인간의 삶과 앎, 정신과 역사를 담는 그릇이며, 구체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집에서 산다. 그리고 모든 학문은 정신은 인간의 일이다. 사람이 건축을 하고, 건축이 사람을 길들이기도 한다. 우리는 정신이나 마음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건물과 도시와 건축 속에서 살아간다. 마음이니 정신이니 행복이니 하는 정신적 가치는 건축에서 보면 인테리어와 유사해 보인다. 인테리어가 성행하고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는 구조를 바꿀 수 없기에 벽지를 바꾸고 바닥을 변화하고 식탁을 바꾼다고 한다. 한국의 주택은 대부분 아파트다. 아파트는 구조를 바꿀 수 없기에 인테리어(장식)만을 손 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가 삶을 바꿀 수 없기에 마음이니 정신이니 행복이니 하는 정신적 인테리어를 하는 듯도 하다. 우리가 지금 기울이는 나와 나의 집에 대한 장식에 십분의 일이라도 건축과 도시에 관심을 둘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과 생활이 훨씬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일테면 종묘 앞에 초고층 빌딩을 지을 것인가, 종묘를 지킬 것인가? 골목을 모두 해체하고 직선 도로를 지을 것인가.
상당한 분량의 책인데도 즐겁게 읽었다. 요즘 나의 독서는 차츰 변화하고 있다. 전에는 아는 체도 하고, 잘난 척도 하고, 세계를 해석해 보려고도, 세계를 변화시킬 단서를 찾기 위해서 읽곤 했다. 또는 나를 찾기 위한다는 미명하에 읽기도 하였다. 그런데 요즘은 독서가 즐겁다. 읽는다는 것이 즐거운 노동이나 놀이로서 생각된다. 도서관은 놀이터고 책은 장난감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 즐기고 놀기에는 독서만한 취미도 없어 보인다. 더 이상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되고,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나의 삶은 내가 건축한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어쩌면 내가 가끔 건축에 대한 책을 읽는 이유는 내 건축을 해보고자 하는 욕망과 관계 있을까?
/세상의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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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이 들려주는 수학적 귀납법 이야기>> 김정하 지음 자음과모음
아주 더디고 느리지만, 뭔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즐거움이 있다. 인식의 즐거움이라고도 하고 지식의 즐거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수학은 매우 어렵다. 앞으로도 큰 진전은 없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계속하고 싶다. 가끔 누군가와 철학이나 인문학을 이야기하다 보면 ‘부정’이란 단어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은 ‘긍정’과 ‘희망’의 대합창을 하는데 마치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수학의 정수에는 +, - 가 있다. +는 긍정이고, -에 부정이라고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기호며, 상징이며, 약속일 뿐이다. 적어도 인문학에서는 ‘부정’이란 개념에 대해서 수학의 마이너스처럼 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연수에서는 +만 있지만, 자연수만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 필요하듯이, ‘부정’이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라 이해해야 한다. 자연수를 기준으로 삼아 음수를 부정수라고 터부시할 것도 아니고, ‘긍정’이라는 개념에 좋다는 가치를 부여하여 ‘부정’을 거부하는 것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 하나를 배제하는 선택이다. 수학에 비해 인문학의 가장 큰 난점은 답이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답이 없기에 진입 장벽도 낮고, 자유가 풍부하기도 하지만, 대신 ‘이론’이 아니라, ‘의견’만이 난립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수학은 ‘의례’를 준수해야 하며, 답이 있기에 진입 장벽도 높고, 자유 혹은 확장성에 엄격한 규제가 따른다. 일 년에 몇 만 건의 논문이 제출되지만, 인정받는 수학적 증명은 채 열 건도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누구나 인문학을 하고 인문학자가 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수학자가 될 수는 없다. 수학은 증명이라는 가혹한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어쩌면 수학의 매력이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가. ‘증명’되지 않는 수학이란 수학이 아니다. 의견만 가지면 누구나 ‘인문학자’가 되고, 의견은 무조건 존중되고 긍정되어야 하는 시대에 ‘인문학’은 ‘책’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인문학도 부정의 방법론과 비판의 근육을 키워야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파스칼이 들려주는 수학적 귀납법이라 하여 천재적인 개인이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을 발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쁜 판단이다. 파스칼의 삼각형도 있다는데, 사실 전에는 없었는데 파스칼이라는 천재가 발견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훨씬 전에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확인되고 증명되었다고 한다. 수학적 사실이나 과학의 이론은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인류가 축적해온 학문과 문화의 토대 위에서 싹을 틔웠다고 한다. 천재가 있다면 그들은 이것들을 종합하고 잘 이용하고 그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자들이 아닐까. 그래서 수학이나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는 듯하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루하고 느린 축적과 반복의 나날들이다. 모두들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거나 기적을 바라지만, 분노나 슬픔의 정량만 높아지고, 우울증약의 처방만 늘어날 뿐이다. 수학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한 개도 없지만, 수학책을 읽다보면 수학은 내게 자꾸 이런 생각을 각인시킨다.
‘증명’은 세상 모든 것을 밝히는 방법이 아니다. 수학적 증명은 몇 가지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조작이다. 먼지 명제가 있어야 한다. 명제란 참 거짓이 명확히 구분되는 문장 혹은 수식이다. 조건은 명제는 아니지만 조건이 결정되면 참 거짓이 판별될 수 있는 문장이다. 가정과 결론은 어떤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때 사용된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와 같은 주장을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참, 거짓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수학적 증명이란 어떤 약속체계에서 가능하다. 증명은 귀납적 증명과 연역적 증명이 있다고 한다. 귀납적 증명이란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실이나 원리로부터 보편적인 명제나 법칙을 유도해 내는 사고 방식’이라면 연역적 증명은 보편적인 명제나 법칙에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실을 밝히는 방식‘이다. 이 책에서 파스칼의 수학적 귀납법은 사실 일반적인 연역적 증명 방법과 유사하다고 한다. 누군가가 맨 처음 ’수학적 귀납법‘이라고 명명해서 계속 쓰고 있고, 확정되었다고 한다. 즉 이미 알고 있는 공리나 정리를 이용하여 증명을 하는 방식이다. 즉 임의의 삼각형 내각 크기의 합은 180도임을 증명해 보시오. 하는 식이다. 귀납적 증명과 연역적 증명의 가장 큰 차이는 반례가 유무에 있다고 한다. 귀납적 방법은 반례를 찾는 증명 방법이라면 연역적 증명은 단지 참인지 거짓인지만을 증명한다.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임이 이미 증명되었고, 보통의 독자들은 외워서 쓰기만 하면 될 것을 증명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사고 실험‘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이런 증명을 배우고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사고 실험이며, 사유의 확장이 아닐까. 사유의 확장이 왜 필요할까. 나의 존재의 바탕이 되는 대상 세계를 이해하고 더 확장시킬 수 있고, 나와 대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나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더 많은 방법적 도구를 갖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수열이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차례로 얻어진 수들을 순서적으로 나열한 것이다. 항의 개수가 유한한 수열을 유한 수열, 항의 개수가 무한하면 무한 수열이라고 한다. 유한 수열이든 무한 수열이든 수열을 모두 적어보시오 요청 받는다면, 유한 수열은 가능할 수 있지만 무한 수열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수열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차례로 얻어진 수이므로 일반법칙, 수열에서는 일반항이라고 하는데, 수열의 법칙을 찾아 표기할 수 있다면 가능할 수 있다. 이를 기호로 {An}이라고 표기한다. 수열{An}에서 이웃하는 몇 개의 항 사이의 관계식과 첫째항이 주어지면 수열{An}의 모든 항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수열의 귀납적 정의라고 한다. 즉 첫째항의 수와 이웃하는 항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식을 만들고 정의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예시를 들면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수열{An}의 일반항을 구하시오/가 된다고 한다. 1부터 100까지의 합을 구하시오.에 대한 일반항은 2분의 n(n+1) 일반항이다. 이는 1부터 100까지의 수열의 관계식을 일반항으로 표기한 것이다. 70까지 덧셈의 크기는 일반항에 대입하면 2,485가 된다. 일반항을 구하면 일일이 덧셈을 할 필요가 없이 바로 답을 구할 수가 있게 된다. 이를 수학적 귀납적 정의라 한다.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그 안에서 해결한다고 힘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찬찬히 그 관계 맺는 방식을 볼 수 있다면 의외로 간단한 해결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이 일반항, 혹은 일반 법칙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 보편적 법칙을 찾았다면 일반법칙에서 개별 사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개별 사례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평생을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반법칙이 참인지 거짓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수학은 우리의 사유는 무한한 대지로 비상하는 것은 아닐까? 수학적 귀납법의 2단계는 1) p(1)이 성립한다. 2)p(n)이 성립하면 p(n+1)도 성립한다. 이를 증명하시오.라고 한다. 책은 파스칼의 삼각형과 피보나치 수열 등을 수학적 귀납법으로 증명하고 있다. 안다는 것은 내가 가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내 사고가 부족하고 그것을 설명할 언어라는 강력한 도구가 없다는 말이다.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울어 버린다. 나는 단지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언제쯤 어른이 되어 어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지. 수학은 나에게 겸손하라고 다그친다. 수학적 귀납법은 명확하지 않는 전제나 너무 작은 범위를 이용할 경우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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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선>> 이병한, 이영주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중국 당나라 시인들의 선집이다. 보름 동안 읽은 책이라곤 이 한 권이 전부다. 언제나 그렇지만, 갑자기 당의 시를 읽은 이유는 없다. 어떤 계기가 있었지만, 꼭 짚어서 말할 수 없다. 잡다하게 책을 읽지만, 갈수록 헤매고 있다. 근래에 우연히 서점에 들러서 김혜순이라는 시인의 <날개 환상통>이라는 시집을 사기는 했다. 아주 오랜만에 구입한 시집이었다. 요 몇 년 사이에 시집이라곤 단 한 권도 사지 않았고, 읽지 않았다. 처음부터 시에 냉담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즉 시인이 넘쳐나고, 시집의 공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때와 약간은 관계가 있어도 보인다. 정확하지는 않다. 늘 무슨 결정을 하든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책을 읽을 것인가가 생계나 이해관계에 맞물리는 일도 아니다 보니 그런 선택이 뚜렷한 계기가 있을 리 없다. 내 취향은 多보다는 小에 있는 듯도 하다. <날개 환상통>을 읽어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더라. 수다스럽다 정도였다. 말들의 잔치에 난 불청객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오래 전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현대를 배우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는 격려가 가을바람처럼 부질없이 느껴진다., 나는 이제 그럴 힘도 의욕도 없구나. 그리고 세상의 공전과 자전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미친 속력이다. 새 엔진을 장착하고, 연료를 주입하여 남들이 쫓아가는 만큼 따라가기를 포기한다. 신발장에서 오래 된 운동화를 꺼내 다시 끈을 조이거나, 낡은 자전거를 손질하여 동네 뒷길을 어슬렁거릴 생각이다. 모두가 나를 앞서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뒤에 남는 길은 온통 내 차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야 할 방향이 없으니, 그곳에서 동서남북, 앞뒤로 왔다갔다하며 놀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특히 마음에 드는 편집은 왼쪽에 원문이 실리고, 오른쪽에 번역문이 실린 점이다. 해설이나 설명이 없이 시 그 자체만을 즐길 수 있어서다. 가끔 운전을 할 때라디오를 듣는다. 한 채널만 맞추어져 있다. kbs클래식 FM이다. 이유는 딱 한가지다. 진행자나 아나운서들의 개입이 가장 적고, 오직 음악만 틀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수다나, 사연들이나 충고나 해설 등이 온통 소음이나 광고처럼 정신을 산란하게 한다. 셀 수 없고, 해아릴 수 없는 사연들, 이유들, 충고들, 주장들 , 해설들. 등등등.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그냥 음악만을 듣고 싶다. 나는 오늘 얼마만큼 말들을 쏟아내었는가? 말이 되는 말, 말이 안되는 말들의 소음을. 이 조용한 밤이 새벽이 없다면 삶을 견디기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한 줄기 석양 빛이 물속에 퍼지니, 강의 절반은 파르스름하고 절반은 붉구나, 9월 초사흘 밤은 정말 아름다우니, 이슬은 진주 같고 달은 활 같다.(백거이 작 저녁 강)/ 이런 정감이나 정취를 현대 세계는 그려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대란 수다스럽다.
어느 책에서 ‘사물의 정형화’라는 말을 들었다. 정형화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일정한 형식이나 틀로 고정하다라는 의미다. 사물은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한다. 정형화를 형상화로 바꿔도 될 듯 하다. 형상화란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추상적인 본질 따위가 어떠한 방법이나 매체를 통해 구체적이고 뚜렷한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이란 바로 사물의 정형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방면으로도 이 말을 적용해 볼 수도 있겠다 싶다. 마음의 정형화, 사유의 정형화, 감정의 정형화 등등. 화가란 사물을 그림으로 정형화하고, 음악가란 사물을 음악으로, 시인이란 사물을 언어로 정형화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형화’ 혹은 ‘형상화’가 없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이나, 감정 등의 사물을 형상화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벙어리나, 장님, 귀머거리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어린애처럼 우는 일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언어라는 형식을 갖추지 못한 어린애는 울부짖는 동물일 뿐이다. 시란 언어라는 도구로 지어진 작품이다. 골동품에 취미가 있는 인사는 골동품을 이리저리 보면서 행복감을 느낄 것이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소리의 형상을 통해 즐거움을 누린다. 내가 골동품에 취미가 있지는 않지만, 唐詩를 읽는 내내 그런 즐거움이 있었다. 어차피 물건도, 소리도, 음악도, 그림도 언어도 감정도 사물의 일종이며, 예술 작품이란 이런 사물을 정형화하는 행위이다. 물건은 내가 만질 수 있지만, 음악이나 시는 만질 수 없는 소리나 사유의 영역이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唐詩를 읽는 내내 골동품 같은 물건처럼 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언어도 또한 하나의 사물이며, 시란 사물(인간의 정서나 사유 등)을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정형화한 작품이 아닐까. 어쩌면 살아가는 일을 삶이라고 한다면 삶은 살아가는 일의 정형화이다. 모든 말과 언어가 시가 아닌 것처럼 또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 아닌 것처럼 언어나 사유나 소리를 어떻게 ‘정형화’하느냐에 따라 소음이 될지 아름다운 예술이 될지 판가름나는 것이 아닐까? 내게 唐詩를 읽는 즐거움은 사유나 감정의 아름다운 정형화를 체험하는 경험이었다. 내 삶이 소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시에서 그런 정형화를 배워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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