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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장편소설 박소현 옮김. 다산 책방.
읽기만 해서는 재미가 덜하다. 그러나 읽기만 한다면 훨씬 수월하다. 흔히 읽기와 쓰기를 한 묶음처럼 여기지만, 읽기와 쓰기는 전혀 다른 분야가 아닐까 싶다. 먼저 문자가 있었고, 그 뒤 읽기가 있었겠지만, 문자가 반드시 쓰기와 연결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 때 문자란 쓰기보다는 기호나 상징의 의미가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판소리 사설도 처음에는 입으로 구전되다가, 18세기를 전후하여 쓰여졌다고도 하지 않는가. 굳이 따져 본다면 읽기(구전, 낭송, 암기)등이 먼저고 쓰기가 나중에 생긴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점은 읽기와 쓰기는 다른 작용이 아닐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잘도 읽는 내가 쓰기 일에 이렇게 애를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읽는 자 따로 있고 쓰는 자 따로 있어도 될 듯 하지만, 또한 잘 읽기 위해서는 쓰기가 필요하고, 쓰기 위해서는 잘 읽을 필요도 있는 듯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세상 이 꼴 저 꼴 경험하기도 하고 얻어들은 것도 많아진다. 세상은 사람들의 삶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가끔 소설이 시시해질 때도 많다. 어느 정도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이들은 이런 말들을 하기도 한다. 내 삶을 글로 쓰면 대하소설로도 모자랄 것이다 같은 말들. 굳이 삶의 굴곡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생애란 파란만장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소설에서 어떤 삶을 하나 더 보탠들 무슨 감명을 더 하겠는가. 그럼 소설은 언어의 예술에 가치를 두어야 할까. 쓰기의 예술일까.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지만, 이것만이 다라면 시나, 희곡, 드라마 대본에 못미칠 수도 있다. 소설은 삶에 교훈을 주기 위해 필요할까. 수많은 도덕이나 윤리서가 있지 않는가.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일까? 단지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이라면 영화나 인터넷에 설 자리가 없지 않을까. 어떤 사상이나 사유에 있을까. 사회 고발에 있을까. 이런 모든 것에 골고루 관계하는 걸까.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가 소설의 좋은 독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알 듯 하다. 읽기 보다 분석에 더 익숙한 사고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삶은 사는 것이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질문은 끝이 없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럼 살면 되지 소설 같은 것은 왜 읽고 쓰는걸까. 하여간 우리의 문명이나 문화는 읽고 쓰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하다는 추론밖에 할 수 없다. 또한 문자란 인구의 집중과 인구의 증가, 도시가 형성되고 우리들의 삶이 사회라는 테두리를 가진 이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더 크고 보편적인 사회란 문자와 같은 비상한 문명의 도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는 근대소설과 그 이전의 소설의 차이를 이야기와 묘사의 차이라고 했다.(누구 어떤 맥락에서 이런 주장을 하였는지 긴 논증이나 인용이 필요하지만 난 전문 비평가도 분석가도 아니기에 생략한다. 알 수도 없다. 그냥 귀동냥이다) . 또 어떤 이는 현대 소설의 주요 테마는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라고도 하며, 이런 경향이 심화되면 개인의 심리 묘사가 소설의 주류가 되어 간다고 하였다. 즉 개체로서의 개인을 다루다 보면 개인의 심리의 분석이나 묘사에 이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에 반해 “전체로서의 인간” 즉 집단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에서 밀려난다고 하였다. 나는 이 두 가지 틀로서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어보고 싶다. 이야기와 묘사는 어떻게 다른가. 이야기는 들려주는 것이고 묘사는 보여주기다. 이야기는 들려주기에 듣는 자, 즉 청자가 필요하고 묘사는 보는 자, 즉 독자가 필요하다.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들려줄 수 있다면, 묘사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여 줄 수가 없다. 이 책은 마치 어릴 적 할머니가 손자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알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진 아이다 된 기분이었다. 매일 보이는 좁은 세계가 내게 무슨 큰 흥미와 재미와 감동을 주겠는가? 나는 집구석을 매일의 일상을 탈출하여 저 평원으로 더 큰 세계로 나아간 듯 하였다.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인간’ 으로서 삶을 느꼈다. 세계는 독립된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유동하고 얽키고 설킨 인간과 모든 것들의 복잡한 세계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개인의 도덕적 모험’의 문법을 가장 잘 구현하는 매체는 할리우드 영화에서가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 수십 만 명의 인간이 죽어나가는데, 주인공이 특별한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한 영웅적인 모험을 그리는 영화들이다. 그리하여 한 영웅은 사랑하는 한 사람을 구하고, 영웅이 된다는 스토리다. 그에 비해 ‘전체로서의 인간’이란 낙동강의 한 물방울이 되어 그 강과 더불어 바다로 가는 긴 여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바위에 부딪치고, 증발 되고, 어떤 웅덩이에 갇혀 썩어가고, 때로는 순풍을 만나 유유히 흐르고, 홍수가 나서 어느 산골에 쳐박혀 말라버리기도 하는 전체로서의 삶. 웅장하고 슬프고, 장엄한 삶. 그래서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나는 모처럼 큰 잔칫상을 받은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들었다. 소설이 이성적 인식의 기쁨 보다는 정서적 감동에 관여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보편적인 정서가 있어야 한다. ‘개인의 도덕적 모험’에 초점을 맞춘 소설은 보편적 정서를 배제하고 개인의 심리에 집중하고 개체성을 더 드러낼수록. 보이는 것의 묘사에만 치중한다면 앞으로도 나의 소설 읽기는 더 어려워 질 듯 하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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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로.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다.
지질학자 데이비드 아처는 //돈은 단기 이익 쪽으로, 그리고 규제받지 않는 공유 자원의 과도한 남용 쪽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경향성은 마치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영웅을 피할 수 없는 파멸로 몰아가는 보이지 않는 운명과 같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대혼란’의 본질이다.
오산천에는 예전에 볼 수 없는 풍경이 나타났다. ‘런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예전에도 뛰는 사람들이야 있었겠지만, 지금의 풍경은 개별적인 ‘런닝’이 아니라, 집단적인 유행을 따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산천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단체로 뛰는 형태를 보니 어떤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많이 걷는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오십 중반이 넘어서니 식사 후 반드시 10분이라도 동네를 돈다. 건강하거나 근육을 키우려는 욕심이 아니라, 소화 능력이 떨어져서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면 속이 불편하고 가스가 차는 느낌이 들어서다. 많이 먹는 것도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먹을 때는 좋지만 그 후 과식에 따르는 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걷고 절제하려고 한다.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 요즘 나의 생활에서 중요도가 커지는 문제는 노후의 삶이다.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대신 은퇴 후에는 내 아버지 세대보다 한참을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모든 데이터가 증명하고 있다. 예전에는 검색해 보지 않았던 연금이나 의료보험에 대해 들여다보기도 하고, 정책이 어떻게 바뀌고 변하는지에 대해서도 기사가 뜨면 대충이라도 훑어보게 되었다. 사실 나의 노후의 삶은 연금이나 공적 부조에 상당한 부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뿐 아니라 보통의 시민들도 비슷한 처지리라. 그래서 가끔 이렇게 빈다. 한국 사회가 평등과 복지를 점점 확장하고 사회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속할 수 있기를 빈다. 전적으로 사회에 기생하여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서는 ‘사회’가 온전히 지켜지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현대인은 좋든 싫든 국가 단위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만약에 국가가 붕괴한다면 삶의 지반이 뿌리째 흔들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의 건강, 마음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국가와 사회의 ‘건강’을 중요시한다. 지금껏 나의 건강이 유지되는 이유는 타고난 유전자, 절제, 걷기, 런닝 등 개인적 노력 때문일까. 사실은 한국의 의료시스템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공적 의료보험이 없었다면 엄혹한 코르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건강 검진이 없었다면 내 개인 부담으로 매년 검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아이구’하는 비명을 입에 달고 사는 노모가 아직도 비교적 건강하게 시장을 배회할 수 있었을까. 평화로운 공존의 질서가 무너진다면 대다수 시민들은 가혹한 현실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자주 그것도 매우 자주 ‘공공’ , ‘복지’, ‘사회’ 등을 마치 하늘에서 혹은 자연적으로 그냥 주어진 권리인 양 착각을 한다는 사실이다. 전기가 끊긴 후에 소중함을 알고, 물과 공기가 희박해진 후에야 그 절박함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일까.
모든 인간은 지구에 산다. 일정한 조건(기후 조건)에서 살아갈 수 있다. 지구가 없거나 일정한 기후 조건이 깨지면 인간은 절멸을 피할 수 없다. 어떤 누구도 이런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처지의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삶의 위기 중 하나는 ‘기후 위기’다. 아직 기후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부류들은 단지 운이 좋을 뿐 다른 이유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충분히 논의하거나, 토론하지 못하거나, 이전의 삶의 방식을 계속 지속하며 위기를 가속시키고 있을까. 주류문학에서 기후 위기는 왜 다루어지지 않을까. 역사, 정치에서 외면받고 있을까. 기후 위기는 단지 기후만의 위기가 아니라,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라고 한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공감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식을 망치는 부모처럼, 기후 위기를 걱정한다면서 기후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뭉뚱그리지 말고 우리는 저자의 주장을 꼼꼼히 살펴볼 이유가 있다. 우리의 문화나 상상력에는 어떤 위기가 있는걸까?
문학, 주로 주류소설(순수소설)에서 기후위기가 외면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순수 소설로 간주되는 것이 기후변화에 대해 드러내는 독특한 형태의 저항 탓이라고 한다. 근대소설은 /내러티브의 정반대로 기능하는 나날의 일상적 디테일을 통해서/ 세상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전례없는 사건은 배경으로 밀어내고 나날의 일상을 전경으로 끌어내는/ 방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추방하고 일상을 부각/하는 근대소설의 양식에 우선 있다고 한다. /필러가 부르조아적 삶의 새로운 규칙성과 양립 가능한 모종의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필러라는 개념은 문학 이론가 프랑코 모레티가 서사성을 통제하고 존재에 정규성, 즉 양식을 부여하고자 고안된 기제라고 함.) 근대의 주체는 부르조아고, 이들이 소설의 주 독자이고, 근대소설은 부르조아적 질서의 현실 안주와 자신감, 인류가 스스로의 운명을 자유로이 주조할 수 있다는 가정을 허락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밀어내고, 비인간의 존재를 배제하고, 듣는 것(내레티브)이 아니라 보이는 것(묘사)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듣는 것이 일종의 허구나 있을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보는 것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만 소설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즉 소설은 근대적 세계관에 충실한 양식을 만들었고, 근대 소설의 특징이라 한다. 저자는 근대소설의 이런 특징을 ‘부르조아적 삶의 규칙성’의 구현이라고 한다. 부르조아라고 하면 우리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지니, 중산층이라고 하여도 좋을 듯 하다. 중산층은 어느 정도의 지위와 생활의 안정감을 가진 계층이나 계급을 지칭한다. 이들은 자신감이 있고, 현실에 안주하고, 스스로 운명을 주조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에 변화를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배제하려고 한다. /오늘날의 기후 현상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미스터리한 작품으로, 생각할 수 없는 형태와 방식으로 되돌아와서 우리를 괴롭힌다/ 근대소설은 이런 기후 변화를 담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근대소설은 ‘개인의 도덕적 모험’만을 주로 소재로 삼고 환경이라는 세계와 다양하면서도 거의 동등한 투쟁을 벌이면서 성장하는 개인의 대한 감각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전체로서의 인간’이 사라졌다고 한다. 개인만 남고 소설에서 집단은 추방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소설이 점점 더 심하게 개인 심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한다. 소설의 흐름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조금만 들여다 보면 한국 문학에서는 이런 기류가 주를 이룬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런 현상은 위험을 보지 않기 위해 모래 속에 자신의 머리만 쳐박는다는 어떤 동물을 연상시킨다. 즉 스스로 고립을 시키면서 현실을 보지않으려는 시도가 아닐까? /지구 온난화가 모든 면에서 집단적 곤경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바로 그때, 인류는 스스로가 집단이라는 발상을 정치, 경제, 문학 영역 모두에서 추방한 주류 문화에 속박당한 처지임을 발견하게 된다/ 전대미문의 기후 온난화는 혼합적인 새로운 형식들이 출현케 하고, 읽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후 위기는 단지 기후라는 단일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다.
설명할 능력이 없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집단과 사회와 인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후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아니, 순전히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나 사회는 없고 개인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일망정 그렇게 느낄 것이다. 이제 기후 위기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내밀한 생활공간에 까지 파고들기 시작하고 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하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미국이나 영미권에서는 부인론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 외 나라들에서는 다들 수긍한다고 한다. 하지만 기후 위기를 뭉뚱그려서 걱정하고 위기를 느끼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가 되면 분명 지금의 ‘진보’, ‘보수’ 이데올로기처럼 격렬하게 대립할 수 있다. 기후 위기는 단지 기후의 문제가 아니라, 부와 권력의 문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고, 가치관이나 세계관과도 연관되어 있다. 인류의 파멸 앞에서도 인간은 사소한 이해관계를 다투는 종일까?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다. 아니 ‘인간’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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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으면서도, 어렸을 때 이미 다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던 책, 머릿속에 영화의 장면 장면이 떠오르긴 하지만, 전체 적인 줄거리가 생각나지는 않는 책, 루이자 메이 올컷의 ' 작은 아씨들'을 나이 50을 앞두고 읽었다.
귀여운 표지 뒤에 숨겨진 950 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는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심한 압박을 주었다.
하지만 단막극을 보듯(이야기가 짧게 나뉘어져서 연결되는 구조라),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읽어 가다 보니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마치가의 네 자매 매그, 조, 베스, 에이미가 어떻게 성장하고 사랑하며 아픔을 극복하는지를 지켜보며 같이 마음 조리게 되는 하지만 결국엔 마음 따뜻해지는 그런 이야기였다.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의 우리 모습과 시대적으로도 너무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준다는 건, 그게 고전이 주는 힘이고 그래서 고전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이야기를 읽기 앞서, 추천의 글을 보면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산다" 라는 문장이 나온다. 50년 가까이 여자의 인생을 살아 온 나에게 그 한 문장은 많은 걸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각자의 가정을 이룬 메그와 조 그리고 에이미가 본인이 가장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책을 덮으며...
행복은 다른 누군가의 잣대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정하는 거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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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해부학 교실에서 오랫동안 일한 해골모형 요한이 은퇴 후 숲속 노부부의 집에서 생활하는 이야기이다. 요한은 노부부의 곁에서 나쁜 사람들로부터 마을을 구하고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할머니를 다독이면서 지낸다.
'사실 할머니는 이웃 사람들이 할아버지 정신이 나갔다고 할까 봐 겁이 났던 거예요. 그러면 이상한 사람들이 집에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남들 도움을 받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 검사하려고 들 거예요.' 요한을 처음 본 이웃집 여자가 놀랐을 때 상관이 없다는 표정을 지은 할머니가 요한에게 사과하며 한 생각이다. 최근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름을 포용할 때 사회는 더 풍요롭고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트리누 란은 1975년에 태어난 문화 활동가로 에스토니아 남부 시골인 브루 지역에서 다섯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는 어른과 어린이,산 자와 죽은 자,인간과 동물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주제를 품고 있다.
변화가 두려운 사람, 다름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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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아이로 자란 소녀는 오직 발레의 꿈에 빠져 살아왔다.
무대 위의 화려하고 사랑받는 삶.
오직 예술이 그녀를 살게 했다.
하지만 사고를 당하고 평생을 회피했던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녀가 도망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게 해준 건 예전에 그녀가 떠나버렸던 사람들이었다.
현실에 사랑이 있었음에도 예술만 쫓았던,
떠날줄만 알았지 돌볼 줄은 몰랐던 고독한 과거를 돌아본다.
이제 낮의 도시를 살아갈 시간.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 불확실성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누가 곁에 남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홀로 남겨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다.
나는 예쁘지도, 부유하 지도, 쾌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에 띄게 똑똑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도 나는 진지하고 우울했다.
p.55 그날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그러니까 같은 학교 아이들, 선생님들, 심지어 엄마까지도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주의 광활하고 검은 공허처럼 무한하고 중대했다.
p.133 언젠가 니나에게 왜 사람들이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 근데 사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지에 엄청나게 신경 써." 내 가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파악했던 유일 한 순간이었다.
p.96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가노바에서 7학년을 마치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내가 무슨 수로 미리 알겠어? 그냥 호기심을 갖고 배 워나갈 수밖에.
p.115 포기하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든 지 가능하며 심지어 즐겹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구에게 그 어떤 것도 인정받을 필요가 없으며, 내가 굳이 무엇이 될 필요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사람들을 예전에는 무시했는데 이제는 평범한 일상에서 단순한 만족을 찾는 이들이 오히려 성숙하고 지헤로워 보인다.
p.194 십 대에서 이십 대까지의 아름다움은 남에게서 받은 것이다.그러다 서른을 넘어가면서부터 그 반대로 남에게 무엇을 주느나에 따라 외모가 달라진다. 생김새만으로도 자기 자신에게, 세상에 뭘 베푸는지 알 수 있다.
p.252 누구나 살면서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죠" 알 텍세이가 말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내가 가장 사랑 했던 사람들은 내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준 이들이었어요."
p.300 창작 본능을 가장 위협하는 건 안락함이다.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 붓을 드는 화가는 없다. 높은 수입을 안경적 으로 벌어들이면서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도 없다. 결국 예술을 탄생시키는 건 배고픈, 불안, 슬픔, 가난, 질병, 외로음이다. 창작의 충동은 긴장 상태에서 출발한다.
p.303 무엇을 '하는지'가 아닌 무엇을 '가졌는지'로 정의되는 부류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무렵 내게는 그 런 이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소유물이 곧 정체성인 걸 자랑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노력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리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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